세상이 그리 만만하더냐?
* 제 글은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하여 씌여졌습니다. 아래 키치너님 블로그로 들어가 확인 바랍니다. 좀 더 공부가 필요하겠네요 *

세종대왕과 최만리에 대한 이야기 하나 해볼까 합니다. 잘못 알려진 덕분에 혹은 의도적인 흑백논리 덕분에 세종대왕은 <주체적 민족의식을 가진 성군>으로 최만리는 이런 세종에 사사건건 딴지만 걸었던 <사대주의 찌질이>로 인식되는 경우가 꽤나 많습니다. 허나 이것은 그야말로 역사왜곡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사대주의를 현대적 관점에서만 해석하려고 하니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데요 당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사대주의란 보편적 현상일 뿐이었습니다. 비단 조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상대방이 압도적으로 강할때는 사대주의적인 정책을 고수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강력한 정권이나 국가로 바뀌면 그쪽으로 사대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문제점으로 지적해야 될 것은 사대주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이냐 아니면 관념적이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무튼 사대적인 인식으로 본다면 세종대왕과 최만리는 똑같이 사대주의자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세종대왕과 최만리에게의 잘못된 인식이 나오게 되는 훈민정음 연구시절부터 내려가 볼까요? 당시 세종대왕은 한국에서 쓰는 한자의 발음을 중국 본토 발음과 같게 만들어 국제화 시대(?)에 이바지 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원나라에 의해 변질된 한자 발음을 한족의 전통 발음을 되찾자는 운동에 의해 홍무정운이라는 책자도 발간되는 등 그 활동이 활발했습니다. 당대의 유명 학자 수준의 세종대왕이 이를 그냥 두고볼리가 없었죠. 세종의 생각으로는 한자는 본래 중국 것이고 그렇다면 외형만 배껴오는 것이 아니라 발음까지 똑같이 해야 그것이 정상이 아니겠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집현전 학자들에게 이 한자를 본토발음(?)으로 읽기 위한 기초단계로서 발음기호 제작을 하라는 명을 내린 것입니다. 이때 집현전의 관리자가 바로 최만리였죠. 최만리 이사람 근 20년을 집현전에서 근무한 골수 학자에다가 공부밖에 모르는 청렴공직자의 한사람이었죠. 즉 훈민정음은 사실 최만리외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결과라는 것입니다.


헌데 최만리와 집현전 학자들은 이때까지 이 새로운 언어가 단지 교육을 위한 발음기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세종대왕의 생각과도 달랐고 후대 훈민정음의 생각과도 달랐죠. 헌데 1443년 12월 (음력)에 이 새로운 발음기호가 완성되고 나서 세종대왕의 생각을 들어보니 학자들이 놀라 뒤집어질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쓰는 한자 모두를 중국 본토발음에 똑같이 쓰도록 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쓰는 <컴퓨터> 라는 글자를 본토 발음에 똑같이 하기 위해 <컴퓨러~>로 바꾸기 위한 것이었단 말이죠. 학자들은 놀라 자빠질 일이었습니다. 아니?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오래된 터라 우리식의 발음으로 바뀌어 잘 쓰이고 있는 것을 난데없이 원어 발음으로 바꾸겠다니?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있나? 라는 것이었죠. 요즘으로 치면 영어 잘하기 위해 영어 특별지구를 만들어서 그 지역에서는 영어만 써라는 둥 하는 작업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학자들 대부분은 도대체 그럴 이유가 어디있나? 경제적 낭비도 낭비일 뿐만 아니라 음운에 혼란만 가져온다고 생각했고 대표자 이름으로 최만리 싸인을 받아 상소를 올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부터 말썽이 생긴 것이죠.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픽션임)

세종대왕 : 이사람아~ 함 봐봐. 중국어 본토발음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 부합하는거 아니겠어? 어차피 쓰는 중국어 제대로 써서 중국 관광객도 유치하고 중국 문학들이 수입될때 이게 사투리인지 아니면 표준어인지도 알아야 하고 말야. 그게 다 조선을 위한 길이라니까? 안그래? 중국에서 성조에 따라 뜻도 달라지는거 당신도 알잖아? 그러니 이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야? 그치?

최만리 : 여보셔. 한자가 들어온지 벌써 긴 시간이 지나서 이미 우리 발음으로 정착되었는데 이제와서 그것을 바꾸면 얼마나 큰 혼란이 오겠습니까? 그 혼란에 따른 기회비용이라든가 교육기간과 투입될 예산. 이런거 생각 안해보셨어요? 사람이 현실적이어야지~!


(이때부터 서로 열받았음)

세종대왕 : 아띠~ 답답하네. 애초에 우리거 아닌거였잖아! 그런걸 제대로 알고 익혀야 쓸모가 있는거지, 그래야 우리도 언어적 후진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거 아냐!

최만리 : 아 이사람... 거기서 후진성이 왜나오나? 현실을 봐야 할것 아냐! 그리고 우리가 지금 중국어 하니? 한자가 들어온지 한참 지나서 이미 한자는 우리거로 흡수된거나 마찬가지야~ 이제와서 엉뚱하게 원어발음이라니 웃기지 않냐?


(여기서 부터는 감정싸움)

세종대왕 : 아 띱때... 야! 너 지금 반항하냐? 나 왕이야 왕! 응? 까라면 까야지 어서 개기냐? 개기길 콱! 그냥!

최만리 : 어쭈~ 치겠네? 쳐보셔 쳐보셔! 뭣 것지도 않은 발음기호 하나 만들어서는 그걸 가지고 무슨 대단한 것인냥 쥐랄이셔? 그거 댁이 만들었수? 전부 연구실에서 나온거 아냐!!


(이때부터는 돌이킬 수 없음)

세종대왕 : 아! 띠발~ 야! 밖에 아무도 없냐? 빨랑와! 의금부 시키들 뭐해! 텨와! <밖에서 뛰어 들어온다>

세종대왕 : 야야야... 아 뒷골땡겨... 야 여기 최만리하고 신석조하고 여기 이 시키들 전부 하옥시켜... 아 열받아...

최만리 : (끌려가며) 쳐 넣으셔! 쳐 넣어! 왜? 삼족을 멸하시지? 조~~~오~~~ 케따~~ 아주 역사에 폭군으로 이름을 박으시지?

세종대왕 : (뒷목 잡으며) 아... 아..... 저.... 띠바가!!! 어후!!



결국 이렇게 된겁니다. 즉 최만리도 세종대왕도 훈민정음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한게 아니었죠. 그 실용 방법에 대한 학자간 의견 차이로 인하여 논쟁을 벌였고 그것이 격해 지면서 감정적 대립도 있었고 그에따라 훈민정음에 대한 비하등이 살짝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애초에 최만리가 훈민정음에 반대할 이유가 없죠. 자기가 만들었고 또 이때까지 훈민정음은 우리가 잘 아는 <나랏말싸미~>로 시작되는 훈민정음이 나오기도 전인 것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이나 최만리 둘 다 훈민정음을 새로운 언어로 쓰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우리가 아는 훈민정음과는 전혀 다른 발음기호와 그 적용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죠.

결국 하옥된 집현전 학자들은 하루만에 풀려 납니다. 최만리가 워낙 유명한 학자에다가 영향력도 있고 또 세종대왕도 훌륭한 왕의 한분인지라 단지 감정 싸움으로 그런 학자를 가두거나 죽일만큼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셨죠. 어쨌거나 훈방조치된 집현전 학자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지만 문제는 최만리가 삐져 버렸다는 것이었죠. 최만리는 훈방 되자마자 바로 사표쓰고 집으로 가버립니다.

세종은 최만리의 강수에 당황해서 애들 보내 달랩니다. < 야~! 뭘 그런거 가지고 삐지냐? 내가 잘해줄께 미안해 돌아와~ 응? > 그러나 최만리는 너무 단단히 삐져 버렸죠. 최만리는 이미 나이도 나이인데다가 내가 저런 대우받고 말라 직장 나가나? 라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세종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최만리를 불렀고 집현전 부제학 자리를 최만리를 위해 비워 두었습니다. 그러나 최만리는 끝내 거부했고 사표쓴지 1년 정도 지나 세상을 떠났죠. 결국 세종의 본토발음 고수정책은 많은 학자들의 반대에 무딪혀 실패로 돌아갔고 어렵게 만든 이 발음 체계를 썩히기 아까웠던 세종은 최만리 사후 1년 반이 지난 다음에 훈민정음으로 발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흑 아니면 백 식으로 나왔던 것이 아니라 최만리나 세종대왕이나 모두 학문에 대해 열정적이었고 자신만의 잣대를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열정적(?)인 토론의 끝에 세종시대의 조선은 그 문화 수준이 타국에 비교하면 서러울 정도로 발전하게 된 것이고 군사와 농업 상업 모든 부분에서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죠. 그 요인에는 이런식으로 수준높은 군주와 수준높은 신하의 치열한 투쟁(?)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고인 물은 파문이 적지만 곧 썩게 되고 흐르는 물은 거칠지만 끊임없이 맑죠.





P.S : 주체와 사대에 대하여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을까 해서 첨언 합니다. 세종대왕은 주체적이십니다. 헌데 그 주체는 현대의 주체가 아닙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과 배경 하에서 그 주류에서의 주체이지 그걸 억지로 현대적 대한민국적 마인드의 주체로 보시면 상당히 곤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종대왕이나 최만리나 모두 그 시대적 배경 하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설사 난데없이 뚝 떨어진 천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시대속의 천재인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 주세요. 세종대왕의 발언 곳곳에서 중국을 상국으로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 기준을 따른다는 말들이 나와도 그것은 그 시대로 봐야 하지 현대의 그것으로 봐서는 곤란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by 파파울프 | 2007/06/06 16:31 | 역사 이야기 | 트랙백(2) | 핑백(3) | 덧글(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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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현명한 '사대외교'에 대하여
파파울프님의 글을 트랙백함 (늦었지만 귀환을 환영합니다. ^^)세상이 그리 만만하더냐?사실 사대주의를 현대적 관점에서만 해석하려고 하니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데요 당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사대주의란 보편적 현상일 뿐이었습니다. 비단 조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상대방이 압도적으로 강할때는 사대주의적인 정책을 고수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강력한 정권이나 국가로 바뀌면 그쪽으로 사대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문제점으로 지적해야 될 ......more

Tracked from The Cubic Ar.. at 2007/09/10 11:45

제목 : 한글 창제, 최만리 창제 협력설은 어떻게 나왔는 가?
아래 글을 쓰다가 잠시 검색해 본 결과,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최만리를 한글 창제에 반대한 학자가 아니라 한글 창제에 공헌했고 세종의 한글 창제는 단순히 중국과의 음을 동일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시작한 정책이 빗나가서 탄생한 "오발탄"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요? 좀 더 검색을 해보니, 아마 이런 이야기의 원 출처라고 생각되는 글이 하나 보입니다.&nbs......more

Linked at 뭔가를 공부하는 사람 : 현명.. at 2007/07/17 21:12

... 파파울프님의 글을 트랙백함 (늦었지만 귀환을 환영합니다. ^^)세상이 그리 만만하더냐?사실 사대주의를 현대적 관점에서만 해석하려고 하니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데요 당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사대주의란 보편적 현상일 뿐이었습니다. 비단 조선 뿐만 ... more

Linked at The Cubic Area o.. at 2007/11/05 06:46

... 세상이 그리 만만하더냐? 원래는 댓글로 쓰다가 너무 길어져서 따로 트랙백으로 씁니다 ^^: 훈민정음의 창제에 관하여 사실 여러 이야기들이 있습니다만, 저는 기본적 ... more

Linked at The Cubic Area o.. at 2008/03/21 00:14

... 세상이 그리 만만하더냐?한글 창제, 최만리 창제 협력설은 어떻게 나왔는 가? 우선 세종과 최만리 모두 조선 시대의 인물로서, 명이라는 상국에 사대하는 것이 조 ... more

Commented by leinon at 2007/06/06 16:43
마지막 말이 여운이 남네요...
Commented by 낭만여객 at 2007/06/06 17:18
컴백을 환영합니다 일단. ㅋ 그리고 위에 사대주의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쓰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님에 대한 관념에 놀랐습니다. 흠 솔직히 그닥 주체적인 분은 아니셨군요.;;; 그래도 성군임은 확실합니다.
Commented by 개발부장 at 2007/06/06 17:27
주체의 의미부터 찾아가야겠습니다만...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군요.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로리 at 2007/06/06 17:29
사대니 뭐니를 떠나서 학문과 사상 그리고 문화가 교조주의적인 모습을 띄면 붕괴되고 타락하는 것 같습니다. 저런 모습이 세종시대의 빛나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Commented by 리린 at 2007/06/06 18:09
세종VS최만리가 이렇게도 각색되는군요. 재밌었습니다 ^^

/ 당시의 사대란 득실차 크지않은 현실적 외교정책일 뿐이었죠. 19세기 이후 근대에나 구체적으로 성립하는 정치, 사회, 역사적 개념들을 중세에 소급적용시키면 난감합니다. (사대/주체 논의로 필요이상 옮겨붙을까 노파심에서;)
Commented by 比良坂初音 at 2007/06/06 18:10
아니 뭐 사실 한가닥 하는 위인들이 가장 위인다운점은 썩지 않는다는 거죠
위인이 아닌 경우는 보통 "아 씨파 내가 왕인데 아랫놈 말들어야 하나-_- 그냥 강행 해!!"
하는 전형적인 군바리 마인드로 임해서 위인이 못되는...(먼 눈)
Commented by 파파울프 at 2007/06/06 18:50
leinon님/ 솔직히 말해 전 썩는 것을 알면서도 좀 잔잔한 것을 원하기는 합니다. 게으르거든요.

낭만여객님/ 현대의 기준으로 과거를 제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려 드리려 쓴 글입니다. 들은 이야기로는 그런식으로 현대의 마인드로 과거를 보는 것을 악마의 기법이라고도 말한다더군요.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요.

개발부장님/ 주체는 현대적 관점일 뿐입니다.

로리님/ 세상에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죠 어느 것이든 탄생 성장 소멸의 과정을 겪는 것은 당연하고 그 과정에서 그러한 모습들이 나타나니까요. 그걸 막기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피를 넣고 움직여 주어야 하죠.

리린님/ 말씀대로죠 왜 자꾸 현대적 관점에서 과거를 제단하는지 모르겠네요.

하츠네님/ 위인들도 인간인데 우리는 위인을 마치 신성한 무엇인냥 취급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조그마한 꼬투리라도 생기면 마치 그 인간의 모든것이 잘못된 것인냥 취급해 버리기도 하고 말이죠. 결국 똑같은 사람입니다만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위인이냐 아니냐가 갈려지는 것이겠죠.
Commented by 사바욘의_단_울휀스 at 2007/06/06 20:13
재미있는이야기군요. 요즘보다 나아 보이는것은 기분탓일까나요^^;
Commented by 키치너 at 2007/06/06 21:49
이에 관해 조금 다른 의견이 있어서 댓글로 쓰다가 너무 길어지길래 트랙백 남겼습니다. ^^:
Commented by 부뚜막고양이 at 2007/06/06 22:47
이오 공감에서 보고 온 사람입니다. ^^ 저는 의견이 조금 다릅니다.
글쎄요, 저는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했다고 보지 않는 사람인지라 동감하기는 어렵네요. 저는 세종대왕이 그의 딸과 함께 만들었다고 알고 있거든요.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면, 기록과 논공행상이 확실했던 그 때에 그런 기록이 없을 리가 없지요.
시대는 사대주의가 대세였지만, 세종대왕 만큼은 확실히 주체적인 의식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업적을 보아도 중국의 것을 철저히 향토화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지요. 대표적인 예로 음악을 들 수 있겠군요.
하지만 최만리와 세종대왕의 경우 사대주의와 주체주의로 바라볼 께 아니라 기득권의 싸움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세종대왕은 왕이었고, 최만리는 양반이었지요. 한문이란 것은 배우기 어려운 것이고, 언문이라 칭하는 것은 배우기 쉽죠. 쉽게 배운다고 학문의 정도가 얕은 것은 아니지만, 그걸 인정했다간 양반-선비의 명분이 사라지죠. 선비란 무릇 어려운 한문을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의 관리가 되는 것이니깐요. 언문을 배운자를 어디에 써먹겠느냐고 최만리가 말한 것만 봐도 그렇죠. 하지만, 왕의 입장에선 기득권이 고착화 되는 상황이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겠죠. 비록, 유학자라서 대우를 하고 있긴 했지만.
좀 배웠단 유학자들은 고려가 망한 시점부터 두문불출하고 있고, 그의 제자들은 아직 정계에 본격 데뷔하지 않은 상태이고, 할아버지로부터 내려온 세력은 무인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이었겠죠. 그나마 있던 유학자들도 아버지가 외척 정리한다고 정리해버렸을 테고. 세종대왕이 집현전을 만들며 유학자를 양성하고자 한 것을 보면, 식자가 없어서 이래저래 골 아픈 상황이었을 꺼에요. 최만리를 다시 부르는 행동은 세종대왕으로선 최만리의 능력이 내버려두기엔 아까웠겠죠. 가뜩이나 유학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뭔가 횡설수설인 것 같아서 슬픕니다. ㅠㅠ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7/06/06 23:11
컴백 환영입니다. 처음 듣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Commented by 銀鳥-_- at 2007/06/06 23:53
저런식으로 보니 정말 머릿속에 쏙쏙 들어옵니다...(....)
Commented by 파파울프 at 2007/06/07 00:45
사바욘님/ 요즘하고 비교하면 곤란하죠 ^^ 민주주의 시대와 왕정시대를 같이 놓고 본다는 것은 무리가 좀 있습니다. ^^

부뚜막고양이님/ 언문이라는 것은 양반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세종대왕이 직접 하신 말입니다. 즉 언문은 한글에 대한 비하용어가 아니라는 소리죠. 세종실록 25년자에 보면 언문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쓰는 사람은 세종입니다.

그리고 언어가 세종대왕 한분에게서 나왔다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언어 체계란 한 사람이 그냥 머리에서 뚝딱 하고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세종께서 한글을 집현전 학자들에게 가르치셔야 한다는 뜻이 되는데 어디에서도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되려 한글이 나왔을 당시 집현전 학자들은 이미 그 체계를 인지하고 그 장단에 대해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세종대왕과 그런 토론이 가능했죠.


또한 언어를 체계적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테스트와 교정작업이 필요합니다. 헌데 그것을 세종대왕이나 혹은 한둘의 노력으로 이루었다는 것은 창문틀 보고 한글이 나왔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죠. (창문틀 이야기는 어린이 책에서나 나올 이야기죠)

그리고... 당시 학자가 없으리라는 추정도 좀 곤란합니다... 당시 제상으로 있던 인물에 최만리 이외에도 유명한 황희정승 같은 분들도 세종대 인물입니다. ^^
Commented by 파파울프 at 2007/06/07 00:46
슈타인호프님, 銀鳥-_- 님/ 각색이 들어가니까요 ^^;;

Commented by gaya at 2007/06/07 01:54
언어체계란 게 한사람 머리에서 뚝딱 나왔다는 건 무리다..는 건 일반인 입장에서의 상식이지만, 어쩌면 그 상식이 가끔 벗어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봅니다.
모짜르트의 영감+아인쉬타인에 비견되는 머리와 학식+노력 이라면요.
음운학의 대가이자 절대음감까지 지녔다던 세종이라는 분이 군왕이라는 고정적 이미지에 가려있었던 놀라운 천재가 아니라는 보장도 없는만큼, 그 분의 창조적 재능이 과연 상식선 내에 있기는 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론 트랙백한 키치너님의 글이 좀 더 설득력 있다는 생각은 합니다...

솔직히 전 한 사람 힘으로도 가능하다고 보거든요. 인간의 말소리가 이루어지고 운용되는 핵심을 꿰뚫을 수 있는 천재라면 말입니다. 그분이 그걸 꿰뚫어서 말소리의 초성 중성 종성을 구분하고 자음과 모음을 나누었다면, 그 이후부터는 운용의 규칙대로 문자를 맞추어 가고 체계화하는 장기적인 노가다 작업일테니 그쯤에서 집현적 학사들의 실력이 개입할 수 있었을테지요.
요는 가장 기반이 되면서도 핵심적인 (일종의 영감이 필요한) 작업을 세종이 해내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그게 없었다면 애초에 성립되지도 못했을 그럴 일을 말이죠. 건축으로 치면 기획+기본설계를 한 것이고, 분명 실시설계 멤버는 존재하지만 그 건물은 최초의 기본 틀과 개념을 만들어낸 이의 작품이 되는 것과 같다 할까요.

자기가 주력하지도 않은 것을 내가 만드노니.. 하지는 않을 거라 보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글창제란 것이 사대부들에게 그리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여긴 것도 아닌 마당에 왕에 대한 예의차원에서 군왕이 친제했다고 적었을 리도 없을 것 같고요.
Commented by 파파울프 at 2007/06/07 01:55
gaya님/ 물론입니다. 그런 선에서는 납득할 수 있는거죠. 문제는 집현전 학자들이 12월 이전에는 그것을 몰랐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서 한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제가 혼자서 할 수 없다는 부분은 말씀하신 노가다 작업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최만리와의 논쟁은 12월에 나온것이 아니라 운해 번역이 지시된 2월부터이거든요. 만약 집현전에서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해도 실록에 12월에 한글을 만드셨다고 했으니 상소문이 운해 번역이 들어간 2월에 나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죠.

이런 재반 과정을 생각할때 혼자서냐 단체냐라는 것의 구분이 중요해 지거든요. 그래서 전 세종대왕의 혼자작업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은 분명히 천제적인 어떤 사람에 의해 가능해 지는 것이기도 하거든요. 그것을 현실화 하는 것은 혼자가 불가능 한거죠.
Commented by 파파울프 at 2007/06/07 01:59
gaya님/ 헉! 수정 하셨군요... 답글 다는데 바로 확~ 늘어나네요 ^^; 그리고 당시 한글이 비루하다? 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좀 과합니다. 왜냐하면 한글이 천대를 받기 시작한 것은 세종때가 아니라 더 후대에요 세종때는 중국의 글이 더 우수하다는 생각은 있었을런지 모르겠지만 한글이 비루하다는 생각은 못하죠.

만든 사람이 세종이라면 왕이 만들었는데 그 글이 비루하다? 라고 생각하면 그건 대역죄죠 ^^;;; 세종 스스로도 한글은 2선급 언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언문이라는 말을 처음 한것은 세종이시거든요.
Commented by 제절초 at 2007/06/07 02:03
와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런 견해도 있었군요 'ㅂ'
Commented by gaya at 2007/06/07 02:12
그런 면에서라면 오히려 저와 님의 의견이 같아졌군요. ^^ 말씀대로 그런 경우는 오로지 혼자 작업이란 건 힘들긴 하겠습니다. 아인슈타인도 논문은 혼자 쓰긴 했지만 그 검증 작업은 다른 학자들이 했을 테니까.
단지 12월에 이미 알았다 한들 집현전 학사들의 작업이 단순히 시키는 대로 그리고 취합한 하도 단계에만 그쳤던 것인가, 아니면 어느 정도 자기 창의성을 발휘하여 체계부터 같이 매만진 협력 단계였느냐에 대해서 아무래도 정황상 전자라고 보고 있는 편이기에, 시키는 대로 한 단순 노가다 작업, 즉 하도작업자까지 창작자 반열에 포함시킬 수는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 그리고 한글을 비루하게 취급했다기 보단, 그저 대놓고 내가 만들었네 공개할만큼 자랑스런 물건은 아니었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Commented by 찌질찌질 at 2007/06/07 02:14
그것이 매우 어렵다 와 그것이 불가능하다 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훈민정음의 시스템이 워낙에 간결하면서도 체계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집단의 중의라기보다는 돋보이는 천재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제가 집현전 학자들이 합심하여 만들었다는 설을 전면 부정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돋보이는 천재 한 사람이 이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정짓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는 것만을 말하고 싶네요.
Commented by gaya at 2007/06/07 02:50
알기로 참여 학사는 보통 강희안, 성삼문, 신숙주 등이고 최만리는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요는 집현전이란 것도 조직체이니만큼 학사 모두가 그 일에만 매달려 있을 것도 아니었을테니, 집현전의 책임자급 최만리라면 왕명으로 똑똑한 넘들 몇명 추려서 뭘 만든다는 정도는 어쩌면 비공식적으로 알았으리라 봅니다.(신출내기들이 윗사람에게 완전범죄 수준으로 딴 짓거리 하는 건 어렵겠죠.) 단 이 고지식한 양반은 부러 공론화하여 확대하지는 않고, 사태 추이를 몇 달 잠잠히 바라보다가, 이거 보자보자 하니 진짜 본격적으로 하시네 이러시면 안되올시다 생각하여 상소를 내었다..는 설이 더 자연스럽지 않는지..
Commented by 파파울프 at 2007/06/07 05:25
제절초님/ 감사합니다 ^^

찌질찌질님/ 아. 제가 말씀드린 것은 집현전 학자들만 똘똘 모여서 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가야님 말씀처럼 세종대왕께서 창안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다듬었다는 이야기죠. 최만리와 세종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극명하게 분할해 버린것일 뿐입니다.


gaya님/ 예, 최만리는 당시 상소문 제출시 집현전의 대표격으로 상소를 올린 것이었죠. 그리고 전 따로 보지 않는 것이 왜냐면 언어나 문자라는 것은 다른 학문과 달리 다수가 사용하고 무리가 없어야 하는 것이거든요.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발견했을때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적었다 해도 그것은 훌륭한 이론으로 있을 수 있지만 문자는 시정 잡배들도 다 알 수 있어야 하니 그 과정에서의 테스트는 창제만큼 대단히 중요한 요소거든요. 따라서 그것을 떼어놓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가정을 하더라도 집현전을 뗄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추정이 아니라 거의 확실히 알았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집현전 최고관리급이 그것도 20년 이상 집현전에서만 근무한 요즘말로 치면 집현전 통이 보안 자료도 아니고 저런 학문자료를 몰랐다는 것은 말이되지 않는다고 봐요. 최만리가 바보도 아니고 말이죠.

그렇다면 12월 당시 발표되었을때 이미 대부분을 알았다고 봐도 무방할듯 합니다. 그러니 바로 2월에 운회의 번역본 작업을 지시하죠. 2월 16일에 지시하고 20일날 상소가 올라갑니다. 즉 그 이전에 알던 것과 달리16일 지시로 알게된 세종의 속내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적극적으로 상소와 반대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두달의 공백기 동안 최만리가 한글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글자를 만들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헌데 왜 두달을 보냈을까요? 바로 그 부분에 진실이 있다는 거죠.
Commented by Shuffle at 2007/06/07 13:43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재밌게 쓰기위해 고민하셨을 모습이 상상되네요
Commented by 에그시드 at 2007/06/07 15:49
안녕하세요 이오공감을 보고 들어왔습니다.
파파울프님의 글에 상당히 공감했습니다. 특히 초록색 글씨에서 피식 웃었습니다.

제가 대학원에 들어와서 교수님과 연구활동을 하는 중에 느낀 일들이 조금 포함되 있는 것 같아서 살짝 적어놓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논문발표에 비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글을 세종 혼자서 만든 경우와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든 경우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글을 세종 혼자서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 머리 굴려서 만든 내용을 갑자기 세상에 발표하기에는 몇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혼자서 만들다보면 자신의 논리로는 가능한데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틀리는 그런 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발표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특히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보여주면서 이게 맞게 쓴건지 아닌지를 검토하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도 분명 이런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언어학자들 중 세종이 보여주면서 검토를 부탁할 만한 전문가들은 집현전학자들일테니 집현전 학자들은 발표전에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집현전학자들과 함께 만든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느 한 학자의 머리에서 모든 내용을 생각했다고 해서 혼자서 모든 구성을 만들기보다는, 학자들끼리 서로 토론을 거쳐서 수정한 후에 세종에게 최종적인 내용을 알렸을 것입니다. 즉 어떠한 방법을 거치더라도 '모든'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집현전학자들은 세종이 발표할 '한글'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좋은 글을 읽게해주신 파파울프님께 감사를...
Commented by 키치너 at 2007/06/07 17:07
또 길어져서 트랙백으로 남깁니다. 이거 연달아 실례가 아닌지 죄송스럽습니다. ;
Commented by 키치너 at 2007/06/07 17:26
그리고 문학박사 황재순 박사라는 분의 최만리 한글 창제 협력 설에 대한 반론도 포스팅해두었습니다.(http://authorK.egloos.com/3480800)
Commented by 파파울프 at 2007/06/07 17:44
키치너님/ 아뇨 아뇨 아닙니다. 덕분에 잘못된 정보를 고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
Commented by cyrus at 2007/06/08 07:04
그러니까 세종은 "도덕, 윤리에 관련된 지식을 보다 쉽게 알리기 위해서 기호의 형식을 말에 보다 가깝게 혁파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게 아니라 (심심해서......) 대안까지 만들어 놓으셨고,

모든 문헌의 형식을 바꾸는 일은,

최만리가 반대했던 것처럼, "몽골을 점령한 명이 왜를 도모하기 위해 '불온한 시도(그 대안)'를 하는 조선으로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처럼, 엄청나게 덩치가 큰 문제여서,

쉽게 누가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서로 다른 영역에서 접근하고 있을 뿐은 아닌지, 즉 세종은 교육을 정치의 핵심적인 도구라고 주장했던 것이고, 최만리는 국제적인 역학관계의 변화를 세심히 살피는 군사적인 혜안이 더 중요하다고 반박했다고 이해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공용화하자는 주장, 대륙쪽 중국에서도 이미 한번 한자를 간략하게 바꾸었는데 아예 글자를 발음기호(영문알파벳기호)로 바꾸자는 주장들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 문제는 솔직히 제가 입방정을 떨 일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어제 저녁에 모니터를 보고 있다가 맛이 갔거든요.


예(禮)에 관련된 지식 자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자> 천도편에, "지금 임금님이 읽고 계신 그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일뿐입니다"라고 어느 수레바퀴장이 영감이 대놓고 이야기를 했다는 일화,

천지편에,

"(공자의 제자인 자공에게) 선생은 널리 배움으로써 성인의 흉내를 내고, 허망한 말로써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홀로 금을 뜯으면서 슬픈 노래를 함으로써 천하에 명성을 팔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 당신의 몸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무슨 천하를 다스릴 겨를이 있다는 것입니까? 선생은 가시오. 내 일이나 방해하지 마시오."

마제편에,

'그러므로 나무의 순박함을 해치지 않고서야 누가 소머리를 조각한 술잔을 만들 수 있겠느냐? 백옥을 깨뜨리지 않고서야 누가 옥기를 만들 수 있겠느냐? 도와 덕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어찌 인의를 주장하겠느냐? [......] 소박함을 해침으로써 도구를 만든 것은 공인의 죄이다, 도덕을 무너뜨리고 인의를 내세운 것은 성인의 잘못이다.'


즉, 책 몇 권 읽었다고 세상 만만하지 않다는 말이죠. 인생 작파하고 한 천 권쯤 더 읽으면, 만만해질까요. 참, 여기서 '사대이즘'는 군사적인 맥락으로 이해되며, 최만리를 사대이스트로 보는 일은...... 아는 바 없습니다. 출판된 <장자>도 하권은 못 읽어 봤습니다. ^^; 어쨌거나 솔직히 세종은 사람처럼 안 보이고(돈으로 보이지오 ㅋㅋ), 최만리는 꼬장꼬장하게 바락바락 군왕에게 대드는 모습이 멋있었습니다. 덧붙이면, 노자, 장자의 생명 그 자체에 대한 긍정이 참 좋았어요. (--), (__)
Commented by 파파울프 at 2007/06/08 18:53
cyrus님/ 일단 정확한 설이 아니라서 문제가 되겠지만 - 키치너님 글처럼 되면 아예 또 가정이 다 바뀌어야 해서 말이죠 - 뭐 아무튼 전 역사에서 세종대왕과 최만리처럼 대놓고 논쟁할 수 있는 분위기 덕분에 조선 시절 중 가장 발달하는 시절이 아니었나 싶어요. 아는 것도 좋고 관망하는 것도 좋지만 속세의 인간은 속세에서 살아야죠. ^^
Commented by cyrus at 2007/06/09 03:03
음, 저는 도시에서 태어났고 이곳을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제게는 여기가 저의 자연이에요. 어딘가를 갈 때면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사람을 틈에서 움직여야 하죠. 그것들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풍경이죠. 누구도 알 수 없고, 마주 볼 수도 없습니다. 저에게는 어떤 윤리적인 기준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긍정할 필요가 있었고, 그들은 모두 살아서 움직이고 있으며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편해져요. 그뿐입니다. 제가 인용한 책은 저에게 그런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마치, 이 도시는 자신의 성장을 저해하는 그 어떤 시도도 가혹하게 거부해 버리는, 어떤 성역 같습니다.

그리고, 성역은 대개의 경우 무덤일 때가 많죠. 책 속에 있는 활자들이, 오히려 살아서 움직이고 자신의 주장을 떳떳하게 이야기하는 '인간'처럼 보일 때도 있구요.
Commented by 파파울프 at 2007/06/09 06:17
cyrus님/ 누구에게나 그런 기준은 필요하겠죠. 그것이 활자가 될 수도 있고 어떤 매체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또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것에서 진실을 찾아 내지 않는다면 어떤것이든 죽은 것 이상의 것은 없겠죠. 어쨌거나 어떤 시간에서거나 저나 다른 사람에게 올때는 그것은 지나간 시간의 것이니까요.
Commented by 크릴새우 at 2007/06/27 15:19
세종께서 여성의 인권을 굉장히 탄압(ㅠㅠ)했다고 하시던데
법과 관련한 것에서도 좀 올려주시면 ㄳ하겠습니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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