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글은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하여 씌여졌습니다. 아래 키치너님 블로그로 들어가 확인 바랍니다. 좀 더 공부가 필요하겠네요 *
세종대왕과 최만리에 대한 이야기 하나 해볼까 합니다. 잘못 알려진 덕분에 혹은 의도적인 흑백논리 덕분에 세종대왕은 <주체적 민족의식을 가진 성군>으로 최만리는 이런 세종에 사사건건 딴지만 걸었던 <사대주의 찌질이>로 인식되는 경우가 꽤나 많습니다. 허나 이것은 그야말로 역사왜곡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사대주의를 현대적 관점에서만 해석하려고 하니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데요 당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사대주의란 보편적 현상일 뿐이었습니다. 비단 조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상대방이 압도적으로 강할때는 사대주의적인 정책을 고수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강력한 정권이나 국가로 바뀌면 그쪽으로 사대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문제점으로 지적해야 될 것은 사대주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이냐 아니면 관념적이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무튼 사대적인 인식으로 본다면 세종대왕과 최만리는 똑같이 사대주의자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세종대왕과 최만리에게의 잘못된 인식이 나오게 되는 훈민정음 연구시절부터 내려가 볼까요? 당시 세종대왕은 한국에서 쓰는 한자의 발음을 중국 본토 발음과 같게 만들어 국제화 시대(?)에 이바지 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원나라에 의해 변질된 한자 발음을 한족의 전통 발음을 되찾자는 운동에 의해 홍무정운이라는 책자도 발간되는 등 그 활동이 활발했습니다. 당대의 유명 학자 수준의 세종대왕이 이를 그냥 두고볼리가 없었죠. 세종의 생각으로는 한자는 본래 중국 것이고 그렇다면 외형만 배껴오는 것이 아니라 발음까지 똑같이 해야 그것이 정상이 아니겠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집현전 학자들에게 이 한자를 본토발음(?)으로 읽기 위한 기초단계로서 발음기호 제작을 하라는 명을 내린 것입니다. 이때 집현전의 관리자가 바로 최만리였죠. 최만리 이사람 근 20년을 집현전에서 근무한 골수 학자에다가 공부밖에 모르는 청렴공직자의 한사람이었죠. 즉 훈민정음은 사실 최만리외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결과라는 것입니다.
헌데 최만리와 집현전 학자들은 이때까지 이 새로운 언어가 단지 교육을 위한 발음기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세종대왕의 생각과도 달랐고 후대 훈민정음의 생각과도 달랐죠. 헌데 1443년 12월 (음력)에 이 새로운 발음기호가 완성되고 나서 세종대왕의 생각을 들어보니 학자들이 놀라 뒤집어질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쓰는 한자 모두를 중국 본토발음에 똑같이 쓰도록 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쓰는 <컴퓨터> 라는 글자를 본토 발음에 똑같이 하기 위해 <컴퓨러~>로 바꾸기 위한 것이었단 말이죠. 학자들은 놀라 자빠질 일이었습니다. 아니?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오래된 터라 우리식의 발음으로 바뀌어 잘 쓰이고 있는 것을 난데없이 원어 발음으로 바꾸겠다니?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있나? 라는 것이었죠. 요즘으로 치면 영어 잘하기 위해 영어 특별지구를 만들어서 그 지역에서는 영어만 써라는 둥 하는 작업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학자들 대부분은 도대체 그럴 이유가 어디있나? 경제적 낭비도 낭비일 뿐만 아니라 음운에 혼란만 가져온다고 생각했고 대표자 이름으로 최만리 싸인을 받아 상소를 올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부터 말썽이 생긴 것이죠.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픽션임)
세종대왕 : 이사람아~ 함 봐봐. 중국어 본토발음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 부합하는거 아니겠어? 어차피 쓰는 중국어 제대로 써서 중국 관광객도 유치하고 중국 문학들이 수입될때 이게 사투리인지 아니면 표준어인지도 알아야 하고 말야. 그게 다 조선을 위한 길이라니까? 안그래? 중국에서 성조에 따라 뜻도 달라지는거 당신도 알잖아? 그러니 이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야? 그치?
최만리 : 여보셔. 한자가 들어온지 벌써 긴 시간이 지나서 이미 우리 발음으로 정착되었는데 이제와서 그것을 바꾸면 얼마나 큰 혼란이 오겠습니까? 그 혼란에 따른 기회비용이라든가 교육기간과 투입될 예산. 이런거 생각 안해보셨어요? 사람이 현실적이어야지~!
(이때부터 서로 열받았음)
세종대왕 : 아띠~ 답답하네. 애초에 우리거 아닌거였잖아! 그런걸 제대로 알고 익혀야 쓸모가 있는거지, 그래야 우리도 언어적 후진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거 아냐!
최만리 : 아 이사람... 거기서 후진성이 왜나오나? 현실을 봐야 할것 아냐! 그리고 우리가 지금 중국어 하니? 한자가 들어온지 한참 지나서 이미 한자는 우리거로 흡수된거나 마찬가지야~ 이제와서 엉뚱하게 원어발음이라니 웃기지 않냐?
(여기서 부터는 감정싸움)
세종대왕 : 아 띱때... 야! 너 지금 반항하냐? 나 왕이야 왕! 응? 까라면 까야지 어서 개기냐? 개기길 콱! 그냥!
최만리 : 어쭈~ 치겠네? 쳐보셔 쳐보셔! 뭣 것지도 않은 발음기호 하나 만들어서는 그걸 가지고 무슨 대단한 것인냥 쥐랄이셔? 그거 댁이 만들었수? 전부 연구실에서 나온거 아냐!!
(이때부터는 돌이킬 수 없음)
세종대왕 : 아! 띠발~ 야! 밖에 아무도 없냐? 빨랑와! 의금부 시키들 뭐해! 텨와! <밖에서 뛰어 들어온다>
세종대왕 : 야야야... 아 뒷골땡겨... 야 여기 최만리하고 신석조하고 여기 이 시키들 전부 하옥시켜... 아 열받아...
최만리 : (끌려가며) 쳐 넣으셔! 쳐 넣어! 왜? 삼족을 멸하시지? 조~~~오~~~ 케따~~ 아주 역사에 폭군으로 이름을 박으시지?
세종대왕 : (뒷목 잡으며) 아... 아..... 저.... 띠바가!!! 어후!!
결국 이렇게 된겁니다. 즉 최만리도 세종대왕도 훈민정음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한게 아니었죠. 그 실용 방법에 대한 학자간 의견 차이로 인하여 논쟁을 벌였고 그것이 격해 지면서 감정적 대립도 있었고 그에따라 훈민정음에 대한 비하등이 살짝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애초에 최만리가 훈민정음에 반대할 이유가 없죠. 자기가 만들었고 또 이때까지 훈민정음은 우리가 잘 아는 <나랏말싸미~>로 시작되는 훈민정음이 나오기도 전인 것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이나 최만리 둘 다 훈민정음을 새로운 언어로 쓰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우리가 아는 훈민정음과는 전혀 다른 발음기호와 그 적용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죠.
결국 하옥된 집현전 학자들은 하루만에 풀려 납니다. 최만리가 워낙 유명한 학자에다가 영향력도 있고 또 세종대왕도 훌륭한 왕의 한분인지라 단지 감정 싸움으로 그런 학자를 가두거나 죽일만큼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셨죠. 어쨌거나 훈방조치된 집현전 학자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지만 문제는 최만리가 삐져 버렸다는 것이었죠. 최만리는 훈방 되자마자 바로 사표쓰고 집으로 가버립니다.
세종은 최만리의 강수에 당황해서 애들 보내 달랩니다. < 야~! 뭘 그런거 가지고 삐지냐? 내가 잘해줄께 미안해 돌아와~ 응? > 그러나 최만리는 너무 단단히 삐져 버렸죠. 최만리는 이미 나이도 나이인데다가 내가 저런 대우받고 말라 직장 나가나? 라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세종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최만리를 불렀고 집현전 부제학 자리를 최만리를 위해 비워 두었습니다. 그러나 최만리는 끝내 거부했고 사표쓴지 1년 정도 지나 세상을 떠났죠. 결국 세종의 본토발음 고수정책은 많은 학자들의 반대에 무딪혀 실패로 돌아갔고 어렵게 만든 이 발음 체계를 썩히기 아까웠던 세종은 최만리 사후 1년 반이 지난 다음에 훈민정음으로 발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흑 아니면 백 식으로 나왔던 것이 아니라 최만리나 세종대왕이나 모두 학문에 대해 열정적이었고 자신만의 잣대를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열정적(?)인 토론의 끝에 세종시대의 조선은 그 문화 수준이 타국에 비교하면 서러울 정도로 발전하게 된 것이고 군사와 농업 상업 모든 부분에서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죠. 그 요인에는 이런식으로 수준높은 군주와 수준높은 신하의 치열한 투쟁(?)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고인 물은 파문이 적지만 곧 썩게 되고 흐르는 물은 거칠지만 끊임없이 맑죠.
P.S : 주체와 사대에 대하여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을까 해서 첨언 합니다. 세종대왕은 주체적이십니다. 헌데 그 주체는 현대의 주체가 아닙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과 배경 하에서 그 주류에서의 주체이지 그걸 억지로 현대적 대한민국적 마인드의 주체로 보시면 상당히 곤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종대왕이나 최만리나 모두 그 시대적 배경 하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설사 난데없이 뚝 떨어진 천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시대속의 천재인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 주세요. 세종대왕의 발언 곳곳에서 중국을 상국으로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 기준을 따른다는 말들이 나와도 그것은 그 시대로 봐야 하지 현대의 그것으로 봐서는 곤란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사실 사대주의를 현대적 관점에서만 해석하려고 하니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데요 당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사대주의란 보편적 현상일 뿐이었습니다. 비단 조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상대방이 압도적으로 강할때는 사대주의적인 정책을 고수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강력한 정권이나 국가로 바뀌면 그쪽으로 사대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문제점으로 지적해야 될 것은 사대주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이냐 아니면 관념적이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무튼 사대적인 인식으로 본다면 세종대왕과 최만리는 똑같이 사대주의자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세종대왕과 최만리에게의 잘못된 인식이 나오게 되는 훈민정음 연구시절부터 내려가 볼까요? 당시 세종대왕은 한국에서 쓰는 한자의 발음을 중국 본토 발음과 같게 만들어 국제화 시대(?)에 이바지 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원나라에 의해 변질된 한자 발음을 한족의 전통 발음을 되찾자는 운동에 의해 홍무정운이라는 책자도 발간되는 등 그 활동이 활발했습니다. 당대의 유명 학자 수준의 세종대왕이 이를 그냥 두고볼리가 없었죠. 세종의 생각으로는 한자는 본래 중국 것이고 그렇다면 외형만 배껴오는 것이 아니라 발음까지 똑같이 해야 그것이 정상이 아니겠나? 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그래서 집현전 학자들에게 이 한자를 본토발음(?)으로 읽기 위한 기초단계로서 발음기호 제작을 하라는 명을 내린 것입니다. 이때 집현전의 관리자가 바로 최만리였죠. 최만리 이사람 근 20년을 집현전에서 근무한 골수 학자에다가 공부밖에 모르는 청렴공직자의 한사람이었죠. 즉 훈민정음은 사실 최만리외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결과라는 것입니다.
헌데 최만리와 집현전 학자들은 이때까지 이 새로운 언어가 단지 교육을 위한 발음기호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세종대왕의 생각과도 달랐고 후대 훈민정음의 생각과도 달랐죠. 헌데 1443년 12월 (음력)에 이 새로운 발음기호가 완성되고 나서 세종대왕의 생각을 들어보니 학자들이 놀라 뒤집어질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쓰는 한자 모두를 중국 본토발음에 똑같이 쓰도록 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쓰는 <컴퓨터> 라는 글자를 본토 발음에 똑같이 하기 위해 <컴퓨러~>로 바꾸기 위한 것이었단 말이죠. 학자들은 놀라 자빠질 일이었습니다. 아니?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오래된 터라 우리식의 발음으로 바뀌어 잘 쓰이고 있는 것을 난데없이 원어 발음으로 바꾸겠다니?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있나? 라는 것이었죠. 요즘으로 치면 영어 잘하기 위해 영어 특별지구를 만들어서 그 지역에서는 영어만 써라는 둥 하는 작업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학자들 대부분은 도대체 그럴 이유가 어디있나? 경제적 낭비도 낭비일 뿐만 아니라 음운에 혼란만 가져온다고 생각했고 대표자 이름으로 최만리 싸인을 받아 상소를 올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부터 말썽이 생긴 것이죠.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픽션임)
세종대왕 : 이사람아~ 함 봐봐. 중국어 본토발음을 정확하게 표현해야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 부합하는거 아니겠어? 어차피 쓰는 중국어 제대로 써서 중국 관광객도 유치하고 중국 문학들이 수입될때 이게 사투리인지 아니면 표준어인지도 알아야 하고 말야. 그게 다 조선을 위한 길이라니까? 안그래? 중국에서 성조에 따라 뜻도 달라지는거 당신도 알잖아? 그러니 이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야? 그치?
최만리 : 여보셔. 한자가 들어온지 벌써 긴 시간이 지나서 이미 우리 발음으로 정착되었는데 이제와서 그것을 바꾸면 얼마나 큰 혼란이 오겠습니까? 그 혼란에 따른 기회비용이라든가 교육기간과 투입될 예산. 이런거 생각 안해보셨어요? 사람이 현실적이어야지~!
(이때부터 서로 열받았음)
세종대왕 : 아띠~ 답답하네. 애초에 우리거 아닌거였잖아! 그런걸 제대로 알고 익혀야 쓸모가 있는거지, 그래야 우리도 언어적 후진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거 아냐!
최만리 : 아 이사람... 거기서 후진성이 왜나오나? 현실을 봐야 할것 아냐! 그리고 우리가 지금 중국어 하니? 한자가 들어온지 한참 지나서 이미 한자는 우리거로 흡수된거나 마찬가지야~ 이제와서 엉뚱하게 원어발음이라니 웃기지 않냐?
(여기서 부터는 감정싸움)
세종대왕 : 아 띱때... 야! 너 지금 반항하냐? 나 왕이야 왕! 응? 까라면 까야지 어서 개기냐? 개기길 콱! 그냥!
최만리 : 어쭈~ 치겠네? 쳐보셔 쳐보셔! 뭣 것지도 않은 발음기호 하나 만들어서는 그걸 가지고 무슨 대단한 것인냥 쥐랄이셔? 그거 댁이 만들었수? 전부 연구실에서 나온거 아냐!!
(이때부터는 돌이킬 수 없음)
세종대왕 : 아! 띠발~ 야! 밖에 아무도 없냐? 빨랑와! 의금부 시키들 뭐해! 텨와! <밖에서 뛰어 들어온다>
세종대왕 : 야야야... 아 뒷골땡겨... 야 여기 최만리하고 신석조하고 여기 이 시키들 전부 하옥시켜... 아 열받아...
최만리 : (끌려가며) 쳐 넣으셔! 쳐 넣어! 왜? 삼족을 멸하시지? 조~~~오~~~ 케따~~ 아주 역사에 폭군으로 이름을 박으시지?
세종대왕 : (뒷목 잡으며) 아... 아..... 저.... 띠바가!!! 어후!!
결국 이렇게 된겁니다. 즉 최만리도 세종대왕도 훈민정음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한게 아니었죠. 그 실용 방법에 대한 학자간 의견 차이로 인하여 논쟁을 벌였고 그것이 격해 지면서 감정적 대립도 있었고 그에따라 훈민정음에 대한 비하등이 살짝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애초에 최만리가 훈민정음에 반대할 이유가 없죠. 자기가 만들었고 또 이때까지 훈민정음은 우리가 잘 아는 <나랏말싸미~>로 시작되는 훈민정음이 나오기도 전인 것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이나 최만리 둘 다 훈민정음을 새로운 언어로 쓰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우리가 아는 훈민정음과는 전혀 다른 발음기호와 그 적용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죠.결국 하옥된 집현전 학자들은 하루만에 풀려 납니다. 최만리가 워낙 유명한 학자에다가 영향력도 있고 또 세종대왕도 훌륭한 왕의 한분인지라 단지 감정 싸움으로 그런 학자를 가두거나 죽일만큼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셨죠. 어쨌거나 훈방조치된 집현전 학자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지만 문제는 최만리가 삐져 버렸다는 것이었죠. 최만리는 훈방 되자마자 바로 사표쓰고 집으로 가버립니다.
세종은 최만리의 강수에 당황해서 애들 보내 달랩니다. < 야~! 뭘 그런거 가지고 삐지냐? 내가 잘해줄께 미안해 돌아와~ 응? > 그러나 최만리는 너무 단단히 삐져 버렸죠. 최만리는 이미 나이도 나이인데다가 내가 저런 대우받고 말라 직장 나가나? 라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세종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최만리를 불렀고 집현전 부제학 자리를 최만리를 위해 비워 두었습니다. 그러나 최만리는 끝내 거부했고 사표쓴지 1년 정도 지나 세상을 떠났죠. 결국 세종의 본토발음 고수정책은 많은 학자들의 반대에 무딪혀 실패로 돌아갔고 어렵게 만든 이 발음 체계를 썩히기 아까웠던 세종은 최만리 사후 1년 반이 지난 다음에 훈민정음으로 발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흑 아니면 백 식으로 나왔던 것이 아니라 최만리나 세종대왕이나 모두 학문에 대해 열정적이었고 자신만의 잣대를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열정적(?)인 토론의 끝에 세종시대의 조선은 그 문화 수준이 타국에 비교하면 서러울 정도로 발전하게 된 것이고 군사와 농업 상업 모든 부분에서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죠. 그 요인에는 이런식으로 수준높은 군주와 수준높은 신하의 치열한 투쟁(?)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고인 물은 파문이 적지만 곧 썩게 되고 흐르는 물은 거칠지만 끊임없이 맑죠.
P.S : 주체와 사대에 대하여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을까 해서 첨언 합니다. 세종대왕은 주체적이십니다. 헌데 그 주체는 현대의 주체가 아닙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과 배경 하에서 그 주류에서의 주체이지 그걸 억지로 현대적 대한민국적 마인드의 주체로 보시면 상당히 곤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종대왕이나 최만리나 모두 그 시대적 배경 하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설사 난데없이 뚝 떨어진 천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시대속의 천재인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 주세요. 세종대왕의 발언 곳곳에서 중국을 상국으로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 기준을 따른다는 말들이 나와도 그것은 그 시대로 봐야 하지 현대의 그것으로 봐서는 곤란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