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세번째 역 사

불과 보름 남짓한 시간에 턱 밑에 칼날이 들어온 조선. 비록 총이 있고 칼도 있었지만 워낙 쾌검을 쓰는 고수인지라 조선은 어쩔 수 없이 협약을 맺게 됩니다. 후금군은 2월9일 부장 유해를 강화도에 짱박혀 있는 인조에게 보내 화의를 요청합니다. 그 조건을 내건것이 두가지가 있었는데 살펴보면

첫번째 : 명나라 연호 천개를 쓰지마요~
두번째 : 인질로 왕자를 내어 놓아요~

였죠. 크게 두가지였지만 여기에 부수적인 여러가지가 따라 붙었겠죠? 뭐 암튼 외교적 수사가 오가고 피말리는 머리싸움(?)이 벌어진 결과 화의 협정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첨가되게 됩니다.

첫번째 : 요 서약 작성 후에 후금군은 당장 물러가세요
두번째 : 함 가면 두번다시 압록강 넘지마요 우리도 안넘어 갈꺼에요~
세번째 : 조선과 후금은 형제국이에요. (당연히 후금이 형, 조선이 동생)
네번째 : 후금과 평화조약에 서명하지만 그래도 명라나와의 관계가 있으니 적대하는 것만은 봐줘요.

이런 조건으로 3월 3일 정묘협약이 맺어지고 원래 인질 조건이었던 왕자 대신 종친인 원창군이 퇴각하는 후금군에 인질로 잡혀 갑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바리바리 금은보화가 가득 담긴 수레가 딸려 가죠. 한마디로 떡실신에 발린거죠. 허면 사실 조선이 이정도로 약했냐? 라면 아니라고 하고 싶어요. 물론 반정과 곧 이어진 난으로 인하여 약화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정도는 아니었죠. 문제는 후금군이 너무 뛰어났다는 겁니다.

<다시한번... 요거이 홍타이지... 또는 청태종>



뭐 비슷한 비유로 항공모함이 득세하는 시대에 거함거포주의에 빠져 있다던가 전차를 이용한 독일의 블리츠 크릭과 프랑스의 보병전차간의 관계와 비슷하달까요? 시대가 변했는데 그리고 상황에 맞는 병법이 있는데 이런 변화에 너무 무심했던 거죠. 조선이 임란이후 배워왔던 것들은 절강병법이라고 왜구를 상대할때나 쓰는 방법이었습니다.


원래 절강병법을 만든 척계광이라는 중국 명장은 당시 왜구의 작고 빠른 기동력에 속수무책이던 중국군을 위해 몇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어요 기다란 병기와 짧은 병기를 혼재하여 적을 혼란시키고 격멸하는 방법이죠. 문제는 이게 보병용이라는 겁니다. 북방에서 말타고 달리는 애들에게는 별로 효용이 없었다는 거죠. 그래서 척계광이 남쪽에서 왜구를 막은 다음 북쪽으로 발령 받아 싸울때는 그곳에 맞는 병법을 다시 고안해 냈던거죠. - 이래서 명장은 다릅니다 -

<요런거 쓰는게 절강병법... 이런거 여러가지를 합쳐서 왜구를 상대 했어요>



헌데 사실 조선이 이 절강병법을 도입한 때는 이런 북방 기마대에 대한 방법론도 적혀 있을 때였는데 조선은 왜구쪽에만 신경 쓴 나머지 신기술의 도입을 하면서 이 부분을 무시한거에요. 즉 왜구를 상대할때는 긴 무기와 짧은 무기를 혼재하고 한 팀이 적을 효율적으로 상대하는 기술이었는데 북방에선 기동력이 강한 기병대 위주라서 이런 단병접전용 무기가 아니라 화포와 화차를 이용한 중화력전으로 바뀌어야 했죠.


헌데 조선은 그대로 단병접전용 방법만을 취해서 군대를 조련하고 있었으니 말타고 돌진하는 북방기병에 상대가 될 수 없었죠. 거기다 상대해야 할 조선의 정예는 이괄의 난으로 녹아 버렸고. 아무튼 조선도 한번 당하고 나니 뜨끔했습니다. 그래서 대책을 세워야 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오죠. 그 인물이 바로 정온이라는 사람입니다.


정온은 선봉의 좌우 중앙군을 방포대 즉 조총수로 진을 구성합니다. 바로 뒤 보조병도 조총수죠. - 아시는 것과 달리 이미 이때쯤 조선도 활 대신 조총이 보병의 주력이었습니다 - 좌측 1000명의 방포대,중앙 1000명의 방포대, 우측 1000명의 방포대로 선진을 구성하고 중앙 바로 뒤에는 보조를 위한 방포대 1000명이 또 구성됩니다. 그리고 그 뒤로 활을 쏘는 사대가 1000명이 구성되는대 이들은 적이 45보 이내로 들어올때 활을 날리는 역할을 하죠.


그리고 바로 그 뒤로 살수 즉 칼과 창을 든 보병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접전시에 전방으로 나가 적을 도륙하죠. 그리고 그 뒤로 편곤을 든 기병들이 1000명 존재합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기사 즉 활을 든 기병이 다시 1000명이 존재하는 형태로 T 자형을 가진 학익진의 변형 진형을 고안하죠. 이것이 삼첩진입니다.


이렇게 두고 보니 참 뿌듯 하더라는 겁니다? 조총의 2열 사격으로 기병 선봉은 충분히 혼란 시킬 수 있고 나름 기병도 조선 초기 능력을 개발시켜 놨으니 인조 입장에서도 참 넉넉한 마음이 생겼을 겁니다. 그리고 마음이 넉넉하다 보니 평소 여진 오랑캐들에게 당한 굴욕도 생각나고 명나라 형님 고생하시는 것도 생각났겠죠. 사람이 이런 마음이 들면 꼭 나오는게 있습니다... 바로 개김성이죠!


사실 병자호란의 원인으로 후금의 무리한 요구를 들이미는데 사실 그 이전부터 양국간의 관계는 문제가 있었어요. 사실 뭐 자주적 민족의식에 입각하여 후금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라면 칭찬받아 마땅한데 명나라는 형님이고 죽어도 내가 기어야죠~ 하면서 정작 엄청나게 덩치가 커지고 힘이세진 후금에게는 차마 겉으로는 말을 못했지만 속으로 오랑캐 이놈의 썅썅바들!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누가 봐도 기분 상하는 것은 당연하겠죠.


그 예는 곳곳에서 드러나요. 당시 조선은 북방에 과도한 산삼 공납을 부과한데다가 지방관들이 사리사욕 채우느라 백성들이 월경을 하는 경우가 많았죠. 압록강 너머 후금땅에 들어가 산삼을 캐오는 겁니다. 사실 월경해서 죽으나 공납 못내서 죽으나 그게 그거였으니 말이죠. 후금에서는 이를 목격하고 조선에 <이놈들 단속좀 해라~> 라고 이야기를 했고 조선은 마지 못해 <알따~> 혹은 <너그들 줄 공물 땜에 글타~> 라는 정도로만 답신했죠.

헌데 계속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조선 정부는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니 후금의 태종 (병자호란전에 청으로 바꿈)은 친서를 보내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아니? 내가 생각해서 바른말을 동생네 몇번이나 전해서 왕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랬는데 그건 듣지도 않고 되려 나보고 변심했다 하면 어짜네? 맹약한 이후로 내 마음 변한건 없어 네가 변하면 변했지...> 라고 보냈습니다. (원문을 쓰면 재미없죠? 딱 이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국서의 내용이 오가면서 뒤에는 어케 될까요? 병자호란 직전에 가면 국서의 내용이 이렇게 바뀝니다.

<아니? 아! 뒷골... 그쪽에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니까 내가 폐물을 늘리자고 말한거 아냐! 우리 까놓고 말해보자고 폐물을 늘리고 싶지 않으면 논리적으로 이런건 이래서 글타 라고 해야 하는거 아냐? 씨바 너네들 비리가 넘쳐서 문제가 있는건 쌩까고 우리보고만 뭐라하냐? 아~~! 졸라~~!!  우리도 물건이 필요하니 무역 루트만 열어두면 이런일 없잖아 막을 건 다 막고 달라는 건 죄다 우리 탓 때문에 곤란하다고 하고 말은 이럤다 저랬다... (여기서 부터 급 흥분)

아 썅! 졸라 열받네 한 말 또하고 한 말 또하고 뭐가 말이 통해야 뭘 해먹지! 좋다! 알따 너그들 맘대로 해라 함 두고보자 우리도 우리 맘대로 할랑께>


딱 이짝으로 나옵니다. 실제 국서에서도 저런 청태종의 열받은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죠. 헌데 조선은 계속 후금을 약올립니다. 뭔가 있는 놈이 개기면 뜨끔한 법인데 보기에 뭣도 없는 조선이 당시 동북아의 최강자였던 후금에 어처구니 없이 기어오르니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빠졌을 겁니다. 결국 승질난 후금의 태종, 1636년 2월 16일에 융알따이(용골대)를 주축으로 한 후금의 사신이 의주에 보내는데 몽골의 장수 77명과 수행원 그리고 후금의 쿠사왕 8인과 몽고 왕자가 직접 쓴 서신이 그 구성이었죠. 

이 서신에는 후금이 청나라로 바뀔 것이며 청태종을 황제의 자리에 올리는 것과 이것에 대해 조선이 찬동해줄 것 그리고 앞으로 형제간이 아니라 군신간의 예를 취해 줄 것,그리고 척화론자를 청나라에 보낼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내용이 조정에 전해지고 조정에서 국제 정세에 좀 밝은 이성구 최명길 같은 인물들은 지금 바로 거부하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좀 두고보자 라고 말했으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의 척화론자들은 당장 사신의 목을 베어 버리고 후금과 단교할 것을 주장합니다.

<치욕의 남한산성>



여론이 이러니 인조는 객관에 이들 사신들을 억류해 두고 국서의 접견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이 사이에도 척화론자들은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죠. 이들이 묵고 있는 객관에 몰려가 <후금은 각성하라! 후금은 자폭하라!>라고 외치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결국 사신으로 온 융알따이와 마푸다는 신변의 위협마져 느껴 한밤중에 몰래 민가의 말을 훔쳐 달아나게 됩니다.


조정에서도 이 일을 알고 얼른 사신을 보내 재발 그러지 말라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고 했지만 어디 그게 씨알이 먹히겠습니까? 당장 생명의 위협을 받을 판인데 말이죠. 결국 이들은 청나라로 돌아가고 인조는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대신에 전국에 동원령을 선포하여 전쟁 준비에 들어갑니다. - 누차 말했지만 이게 자주적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에 의한 정신이라면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

거기다 엎은데 덮어서 인조는 전국에 방을 내려 <청나라 여진족 오랑캐 시키들이 옛날의 고마움을 잊고 우리에게 찝쩍거린다. 그간 본좌는 백성과 나라를 생각해 울분을 참으며 지내왔지만 더이상 눈꼴시려 못봐주겠다. 하여 전국의 한가락 하는 인물들은 여기 모여 한바탕 해보자> 라고 했으니 청태종은 더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죠. 당시 명나라를 완전 공략하기 위해 여러모로 바빴지만 몸소 10만의 병력을 차출해 몸소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치기위해 나섭니다.


그리고... 이후 전쟁 시작 한주 남짓에 수도가 떨어지는 판타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To Be Continued



P.S : 개인적으로 이때 조선이 광해군과 같은 인물이 계속 집권하여 청나라와 연분을 맺은 다음 명나라 공략에 어느정도 도움을 줬다면 옛 고구려 땅은 다 못 얻더라도 연해주나 만주 일부 정도는 얻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사실 청나라는 중국을 점령한 이후 만주땅은 봉해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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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석 : 청 2009-04-09 12:27:47 #

    ... p;조선왕조실록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병자호란 마지막 by 파파울프 병자호란 1편 by 초록불 병자호란 세번째 by 파파울프 병자호란 네번째 by 파파울프 ☆#by 번동아제| 2009/04/07 23:13 | 역사잡설 | 트랙 ... more

덧글

  • 로리 2007/07/26 15:55 # 답글

    드디어 희대 삽질의 조선군 판타지가 벌어지는 겁니까?

    -_-;
  • Shuffle 2007/07/26 16:01 # 답글

    15일걸린걸 더 대규모 병력이 일주일밖에 안걸리다니 그동안
    병자호란에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는데 무지 황당해지네요;;
  • 파파울프 2007/07/26 16:14 # 답글

    로리님/ 아직... 다음편에 삽질 전투가 나옵니다. ㅡ.ㅡ;

    Shuffle님/ 정확하게는 인조가 강화도로 튀려는걸 막아 버린 시기죠. 사실 그 시점에서 싸움 끝났죠 뭐...
  • 서군시언 2007/07/26 16:18 # 답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만 마지막 글에는 동의할 수가 없군요. 청말기에 청나라는 서구열강에게 다른 지방은 순순히 조차해주었지만 만주의 요동지방은 청일전쟁에 패배하기 전까지 양도하지 않았습니다. 간도(서, 북간도) 지방도 아예 봉금하여 사람들이 살지 못하게 했지요. 따라서 광해군이 집권했든지 말든지 우리나라 영토가 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서군시언 2007/07/26 16:22 # 답글

    아, 그리고 덧글 두번 달아서 죄송합니다만 만주땅에 한족을 들어가지 못하게 한것은 나중에 만주족이 중국에서 쫒겨나면 만주로 도망가려고 한 것입니다. 뭐 그 엄청난 땅에 수십만도 안되는 만주족과 소수민족들만 살았으니 거의 빈땅이었습니다만 그래도 중국과 동등한 직할지였습니다(다른 곳은 번부였습니다: 차하르부, 중가르부 이런 식으로). 나중에 러시아가 그 지방을 위협하니까 그때서야 개방한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 파파울프 2007/07/26 16:26 # 답글

    서군시언님/ 물론입니다. 만주를 몽땅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때까지도 이루어 지고 있던 조선민의 압록강 이북 이주등과 동북 지역에 대한 것을 말하는 거죠. 초기 청나라 성립때는 봉금땅이 아니라 현역 청나라의 영토였고 중국이라는 거대 지역과 조선의 협력을 생각한다면 어느정도의 유도리는 있을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거죠.

    적어도 압록강 이북지역과 연해주 지역으로 이어지는 땅만을 얻더라도 비록 산악이지만 나름대로 이익이지 않을까 한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거야 말로 그냥 가상이니 딱이 이렇게 된다는 보장도 없는거죠.
  • 比良坂初音 2007/07/26 16:49 # 답글

    .....갑자기 궁금한게 생깁니다만;;
    조총수들의 운용은 대체 어떻게 한겁니까?
    당시 조총들의 특성상 활에 비해서 한발 발사 후의 인터벌이
    상당히 길었을텐데 기병 상대로 이거 꽤나 치명적인 문제일텐데요
    그렇다고 조총이 활같은 곡사무기도 아니니 비스듬히 높게 쏴서
    살상능력을 발휘한다는건 말도 안되고;;;
    조총의 사정거리를 감안한다 해도 성문닫고 성에서
    농성전만 벌인다면 모를까 평지 전투면 기병의 선봉진 조금이나
    떨구고 나면 그대로 완전 발렸을거 같은데요;;;
  • 더카니지 2007/07/26 17:09 # 답글

    병자호란 때 조선군 전투 상황 몇개보면 운도 없었어요. 쩝. 형제나 군신이나 어차피 똑같은 것 당장에 청나라에 줄서면 조금이나마 이익인데....
  • 파파울프 2007/07/26 18:38 # 답글

    하츠네님/ 조선은 이단방식을 사용했습니다. 한줄이 발사하고 뒤에서 장전 그리고 그 쪽에 앞으로 나오고 발사한 줄은 뒤로가서 장전. 사실 이렇게 해도 기병의 본격적 돌격을 막기는 힘듭니다. 임란때 일본의 삼단철포 형식에서도 조선 기병은 뚫고 들어간 기록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분명하게 기병의 일기당 유지 및 보유 비용은 엄청납니다. 보병 열명으로 기병 하나를 잡을 수 있다고 해도 이익인데 조총을 이용해 기병을 다수 잡고 전열을 흐뜨린다면 엄청난 이익이죠. 보병 숫자만큼의 기병을 가진 상대라면 할 수 없지만 보통 그렇게 많은 기병은 없거든요.

    그리고 일정 이상 흐뜨리고 나면 그 뒤에서 냉병기를 가진 부대가 접전하는거죠. 이미 일단에서 조총병에게 속도를 잃은 기병은 뒤로 가면 난전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훈련된 보병 셋 정도로 기병 하나 정도는 잡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조총병이든 검병이든 창병이든 <훈련된>이라는 조건이 붙죠... 훈련되지 않은 보병은 기병의 돌진으로 인한 울림으로도 전력이 다운되어 버리니...

    더카니지님/ 운도 실력이죠 뭐... 운빨이 따라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번 겹치면 그건 운만으로 치부할 수도 없으니 말이죠.
  • 정시퇴근 2007/07/26 18:57 # 답글

    아 병자호란에 대해서 이렇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니...

    감동입니다.

    시간이 나는데로 파파울프님 포스팅 다 뒤적여야겠습니다.

    ^_^; 감사합니다~
  • 미스터 박 2007/07/26 18:57 # 삭제 답글

    "청나라 여진족 오랑캐 시키들이 옛날의 고마움을 잊고 우리에게 찝쩍거린다. 그간 본좌는 백성과 나라를 생각해 울분을 참으며 지내왔지만 더이상 눈꼴시려 못봐주겠다. 하여 전국의 한가락 하는 인물들은 여기 모여 한바탕 해보자." <- 대략 이 부분에서 본인은 안구에 쓰나미가..... 본좌는커녕 쪼렙도 안되는 양반이 진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도 모르고.... 또 이랬던 양반이 삼고구배의 굴욕을.... IIIorz
  • 比良坂初音 2007/07/26 19:36 # 답글

    이단방식이라-;; 기병은 절대 못막겠군요;;;
    앞에 거마창(?)이라도 촘촘히 깔지 않는 이상에야;;;
  • 파파울프 2007/07/26 20:10 # 답글

    졍시퇴근님/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스터박님/ 왕정의 문제점인지 아니면 이전에 뭔가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특별히 그런때에 그런 일을 당해서인지... 사실 다른 방법들을 모색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음편에서 나오겠지만요...

    하츠네님/ 당연히 거마창 정도는 준비하죠... 하지만 기병 3천을 기를 비용이라면 조총병 1만도 기를 수 있을껄요? 기병 3천에 조총 3천이라면 게임이 안되지만 기병 3천에 보병 1만 정도면 해볼만 하죠. ^^
  • 을파소 2007/07/26 22:45 # 답글

    용인전투와 쌍벽을 이루는 쌍령전투가 머지않은 건가요?
  • 파파울프 2007/07/27 00:04 # 답글

    을파소님/ 아마... 담 번에 나오겠죠~ ^^
  • BigTrain 2007/07/27 00:08 # 답글

    아아... 안구에 소나기가 쏟아져내리는군요. ㅡㅜ 이건 뭐 명분도 없어, 계산도 없어, 대체 뭘 믿고 청에 도전한건지... ㅜㅜ
  • 파파울프 2007/07/27 00:12 # 답글

    BigTrain님/ 뭐 아예 막장이면 그렇게까지야 하지 않았겠죠. 나름 군대를 믿고 있었나 봅니다.
  • 행인1 2007/07/27 00:24 # 답글

    그런데 저때 인조가 전쟁한다고 내린 교서인가를 청 사신들에게 도둑맞았(!)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나저나 인조가 믿던 그 "군대"라는게 삼남에서 소집해 올라오는 거겠죠?
  • 다테 2007/07/27 01:07 # 삭제 답글

    절강병법..의 출전은 혹시 기효신서인가요? ^_^

    왠지 익숙한 그림들~
  • 이재우 2007/07/27 02:02 # 삭제 답글

    짤방의 인물은 홍타이지가 아니라 그 아들내미 순치제 아닌가요?
  • 파파울프 2007/07/27 03:27 # 답글

    행인1님/ 어라? 교서 도둑일은 저도 모르는 거였는데? ^^; 고거 좀 조사해 봐야 겠네요.

    다테님/ 예 기효신서에요... 절강병법은 그 자체를 말하는 거고 그걸 정리한 챍이 기효신서.

    이재우님/ 앗! 듣고는 다시 보고 수정했습니다. 아... 정말 부끄러워요...^^;;;
  • wool 2007/07/31 10:42 # 삭제 답글

    마지막에 쓰신 p.s.의 멘트에 찬성합니다. 실제로 청나라는 동족인 조선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청은 중국을 경영하면서 한족의 나쁜 문화에 오염될까봐 한족의 만주출입을 금했으며 조선으로 하여금 만주지역을 경영해줄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 파파울프 2007/07/31 12:28 # 답글

    wool님/ 전 여진과 조선이 동족 개념이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주지역에 대한 경영 문제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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