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네번째 역 사

자... 빡돌은 청태종의 진격! 조선도 가만히 있을 수야 없었죠. 당장 군대...가 아니고 사신 박노와 박난영을 심양으로 보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형적인 뒷북이었죠. 이미 청군 선봉 기병 6천이 전쟁하러 떠난 마당에 이제야 사신이 출발하고 있으니 어찌 뒷북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더구나 선봉군 기병장수는 시위 때문에 도망쳤던 사신중의 한명인 마푸다 였습니다.

<압록강... 여기를 얼었을때 건넜으니 얼마나 수월했겠습니까>


12월 2일 선봉 마푸다의 6천 기병이 쾌속 전진을 위해 출발하고 뒤이어 좌익과 우익이 출발을 합니다. 그리고 12월 3일 태종은 중군을 이끌고 심양을 떠나 조선으로 향하죠. 아무튼 12월 8일 경 마푸다의 6천 기병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쾌속 진군을 시작합니다. (이들은 강이나 바다를 건너는 전투를 준비하지 않은 탓에 항상 겨울 강이 얼어 붙을때를 골라 전투를 벌이죠) 이들의 목적은 점령이 아니라 길목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은 뻑하면 강화도로 튀어버렸던 탓에 지휘부가 강화로 들어가면 수전에 익숙하지 못한 청군은 시간과 비용과 위험을 감수해야 했거든요. 그래서 압록강을 건넌 이후부터 성이나 마을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오로지 도성을 향한 쾌속 진군만을 합니다. (이들이 유목민이라는 것을 여기서 짙게 알 수 있죠)

당시 의주부윤으로 있던 임경업 장군은 요충지였던 백마산성에 주둔하며 청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려 하였으나 마푸다의 기병은 기병의 뛰어난 기동력으로 우회해 버리죠. 이때 청군이 보여 주었던 속도는 경이적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친왕 도도가 이끄는 좌익군 3만도 이날 오후 압록강을 건넜고 의도적으로 조선이 비운 의주로 들어갔죠. 그리고 휘하의 서이도와 니칸은 백마산성 앞까지 진격했다가 백마산성에서 포격을 시작하자...

<임경업 장군>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즉 예전의 전투와 달리 거점을 확보하지도 않고 유목기병의 빠른 기동력을 이용하여 수도와 임금을 포위해 전략목표를 달성하려는 시도였습니다. 한마디로 블리츠 크릭이죠. 몽골기병도 그렇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동양쪽에서는 독일이 2차 대전때 사용한 전격전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죠. 따라서 조선이 아무리 마지노라인처럼 중무장 요새를 구축해 놓은 들 속절없이 당할 뿐이었습니다.

12월 10일에는 청태종이 이끄는 중군마저 압록강을 건넜고 이들 또한 앞에서 막고 있는 백마산성은 뒤돌아 보지도 않고 일부의 병력만을 남겨둔체 남진을 계속합니다. 12일이 되어서야 조정은 임경업 장군이 보낸 장계를 통해 이미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으며 별다른 전투 없이 빠른 속도로 남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13일에는 김자점의 장계로 청군이 안주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렸고 이날 저녁 다시 보낸 장계에서 평양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이 보고됩니다.


조정은 똥줄 탔습니다. 아니? 어제 압록강 건넜다는 소식이 도착했는데 오늘 낮에는 안주가 그리고 밤에는 평양에서 청군이 보였다면 일이 참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14일 개성통과 소식까지 전해지자 조정은 전국에 사면령을 내리고 전시 체재로 급히 전환한 다음 상중에 있던 심기원을 불러들여 한성을 지킬 유도대장에 임명하고 명나라에 구원의 사신을 보내고 8도에 근왕병도 모을 방을 띄우고 세자빈과 원손, 봉림대군, 인평대군은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블라....

헌데 이게 하루만에 하려니 어디 제대로 되겠습니까? 심기원이 한성을 지키라고 상중에 불려나와 받은 병력은 600에 불과했고 이런저런 일을 끝내고 밤에 강화도로 튀려했던 인조와 소현세자는 청군의 선봉이 벌써 강화도로 가는 길목인 양천을 장악하고 있다는 소식에 다시 남대문 쪽으로 되돌아 와야 했습니다.

그래도 항상 목숨 내어놓고 보필하는 신하는 있는지라 최명길이 청군 진영으로 찾아가 마푸다를 독대하여 시간을 끄는 사이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이끌고 지금의 을지로를 지나 신천과 송파 나루를 건너 밤 10시 무렵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갑니다. 웃기는건 이때 왕을 호위하던 군사들은 죄다 도망쳐서 왕의 주위에 열명도 되지 않는 사람들만이 남아 있었고 세자를 호위하던 군사는 아예 하나도 남지 않아서 세자 스스로 말에 채찍질 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와야 했습니다.

웃기는건 청나라 사신의 목을 베라며 객관에 몰려가 시위를 벌였던 인간들은 하나같이 전쟁이 시작되자 마자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는 거죠. (제가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하면서 정말 좌절스러울때가 바로 이런 기록들이 나올때 입니다. 사상이 다르고 신념도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지가 한 말은 지킬 줄 알아야죠. 물론 다 그런건 아닙니다만...)


그리고 15일 새벽 남한산성에 있으면 죽도밥도 안된다는 생각이 든 인조는 야음을 틈타 성을 나와 강화도로 튀려고 했으나 밤새 눈보라가 몰아쳐 길이 얼고 인조가 탄 말이 쓰러져 다리가 부러지고 거기다 걷는것도 실패한 인조는 다시 성으로 들어옵니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1만 2천의 병사가 있었고 거기에 인조 휘하의 백관과 의원들이 300명 그리고 훈련도감과 어영청 총융청 등의 군대를 합해 1만 3천 800가량의 군대와 아껴먹으면 50일 정도 버틸 수 있는 식량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16일에는 청군의 선봉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더이상의 지원과 연락을 끊어 버렸고 1637년 1월 1일에는 아예 태종의 중군이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진을 치고 모든 희망까지 뿌리 뽑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남한산성을 적극적으로 공략하지도 않았고 기병들을 동원해 도성 주위 지역을 약탈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굳어 주먹쥐고 때릴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라는 거죠.

9일날 압록강을 건너 16일날 선봉이 남한산성을 포위....며칠 걸렸을까요.... ㅡ.ㅡ;;;




자! 이제 여기서 그럼 인조가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이때... 다른 병력들은 어떠했을까요? 자... 우리는 여기서 병자호란 최대의 치욕 쌍령전투를 보시게 됩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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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석 : 청 2009-04-09 12:27:47 #

    ...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병자호란 마지막 by 파파울프 병자호란 1편 by 초록불 병자호란 세번째 by 파파울프 병자호란 네번째 by 파파울프 ☆#by 번동아제| 2009/04/07 23:13 | 역사잡설 | 트랙백(2) | 덧글(85) ... more

덧글

  • 초록불 2007/07/29 16:34 # 답글

    갖혀 있는 -> 갇혀 있는... 입니다.

    둘다 발음이 가쳐있는-이 되어서 이런 실수들을 종종 하더군요.
  • 파파울프 2007/07/29 16:53 # 답글

    초록불님/ 언넝 수정했습니다... 음...
  • 천재의주 2007/07/29 18:13 # 답글

    진짜 이 병자호란을 보면 볼수록 안구가 장백폭포화하는 느낌만이....
  • 로리 2007/07/29 18:22 # 답글

    현대 기동전 개념이 이미 청나라가 잘 사용하고 있군요... 집중된 적은 병력이 빠른 기동을 통해 전략 목표의 타격을 이룬다라는.... 그나저나 청나라 사신의 목을 베라며 객관에 몰려가 시위를 벌였던 인간들이 사라진 것은 인류 역사상 원래 저런 인간들은 많으니 그려러니 한데, 도대체 왕과 세자를 지키는 병사 마져 사라지는 것은.....-_-;

    조선의 국방관계가 아무리 취약해도 저건 임진년의 재탕이니....
  • 슈타인호프 2007/07/29 18:22 # 답글

    마부대가 "사산으로 왔던"이라고 되어 있네요. "사신"이죠?^^
  • 比良坂初音 2007/07/29 18:52 # 답글

    제가 현실을 살아가면서 가장 좌절할 때도 그런 때죠
    인간들이 자기 주둥이로 지껄인 말은 지켜야지 말야-;
  • 미친고양이 2007/07/29 20:54 # 답글

    드디어 쌍령이군요.orz
  • 파파울프 2007/07/29 22:03 # 답글

    천재의주님/ 왠만하면 잘 봐주려는 편이지만... 병자호란은 정말...

    로리님/ 의외로 그렇게 도망치는 부류들이 꽤나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중앙집권적 절대왕정이 서구의 사례보다 훨씬 덜한 면도 있고 전투보다는 농경위주의 사회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어떤때 보면 미쳤나 싶을 정도로 화끈한 면도 있고...

    뭐 어쨌거나 재탕이라기 보다 그런 형편이니 저렇게 박살난거 아니겠습니까.

    슈타인호프님/ 엣~ 네... 사신입니다... 수정할꼐요 ㅠ.ㅠ

    하츠네님/ 웃긴건 저들의 영향력을 무시하지도 못한다는 겁니다.

    미친고양이님/ 네... 쌍령입니다. 헌데 예상과는 좀 다르실 겁니다. ^^;
  • tyong군 2007/07/29 22:52 # 답글

    엣..처음으로 리플을 남기는군요 ㅡㅂㅡ 병자호란에서는 김준룡과 유림의 활약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아요. 쌍령은 정말...otL
  • 파파울프 2007/07/30 08:20 # 답글

    tyong군님/ 쌍령의 패배가 생각보다 그리 심각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해요.
  • 하늘이 2007/07/30 09:16 # 답글

    "아껴먹으면" 이 "아까먹으면"으로 되어있군요. "몇일"은 아마 "며칠"일 겁니다. 오타를 찾아내는 즐거움이란... ^^
  • 파파울프 2007/07/30 09:24 # 답글

    하늘이님/ 수정했습니다...으... 으... 이놈의 오타는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네요...
  • 루드라 2007/07/30 16:09 # 답글

    파파울프님의 글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

    근데 글에서 만주족을 유목민이라고 하셨는데 만주족은 유목민이 아닙니다. 유목민이 될려면 계절에 따라 초지를 이동하며 가축(주로 소와 양 혹은 순록)을 키워야만 유목민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유목민이라면 주 생산품이 이들 가축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만주족은 계절에 따라 이동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주요 소득 또한 수렵이나 농경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소와 돼지 같은 가축은 약간 키웠지만 이동하지는 않았습니다. 약간의 이동이라고 볼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가축을 키우기 위한 것이 아닌 사냥감의 이동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만주족은 어느 모로 보든 전형적인 수렵민족이었고 누르하치 당시에 서서히 농경으로 전환 중이었는데 누르하치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농업으로의 전환에 가속이 붙게 됩니다. 이들이 해마다 장성을 넘어가 명나라 사람들을 납치해 온 것도 바로 농경에 종사할 인력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습니다.

    물론 후금에 복속한 몽골인은 유목민이었습니다.
  • 파파울프 2007/07/30 16:13 # 답글

    루드라님/ 아!... 그걸 완전히 오해하도록 글을 써버렸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진도 지역별로 워낙에 특성이 있는터라... 그리고 당시 진군했던 병력에 몽골병도 상당히 섞여 있었거든요 (1만이었나? 2만이었나...) 그래서 그냥 그렇게 써 버렸어요. 음...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 총천연색 2007/07/30 22:27 # 답글

    이건 뭐...
    볼 수록 가관.;;;
  • rula 2007/07/31 10:51 # 삭제 답글

    루드라님/파파울프님이 말한 것처럼, 여진도 특성이 있습니다. 건주여진은 거의 반농반목의 상태이며 야인여진의 경우는 몽고와 다름없는 유목생활을 해왔습니다. 또한 몽고와 청은 거의 동족으로(조선도 마찬가지) 청은 칭기즈칸의 종친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대칸의 칭호를 얻게 됩니다. 조선 침략 및 명 정복 시 당연히 몽고군이 동원되었죠.
  • 파파울프 2007/07/31 12:27 # 답글

    총천연색님/ 제가 악의적인 투로 적어서 더더욱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루드라 2007/07/31 15:16 # 답글

    rura// 물론 님의 말씀처럼 여진도 특성이 있으며 이들을 뭉뚱거려 말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대략 당시의 여진은 누루하치의 건주, 그 북쪽의 해서, 그리고 동해안쪽의 야인여진이 있으며 사실 이들은 각기 별개의 종족으로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누르하치가 해서여진에 보낸 국서에도 "너희는 해서 우리는 만주..."하는 식으로 전혀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고요. 더구나 야인 여진의 경우는 워낙 여러 민족들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이라 이들이 만주족과 동족 의식이 있었는지도 의문스럽습니다.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에 만주군에 몽골군이 포함되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들이 유목민 인 것도 사실이며 만주 종실이 이들과 대대로 혼인하기도했고 누구보다 친근감을 느낀 것은 맞습니다만 동족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언어가 전혀 다르고 혈통상의 친근관계도 일부 황족과 귀족들을 제외하면 근친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해서 여진은 지역적으로 몽골과 인접해서 서로 혼혈이 많이 일어났고 언어적으로 서로 아주 가깝습니다.

    그러나 건주든 해서든 야인이든 모두 수렵민이지 유목민은 아닙니다. 만주군에 포함된 몽골인은 유목민이라고 위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 유목민이 될려면 계절에 따라 초지를 이동하면서 가축을 키워야만 유목민입니다. 설사 가축을 키운다고 하더라도 계절에 따라 이동하지 않으면 유목민이 아닙니다. 여진의 경우 건주는 수렵민에서 농경민으로 전환 중이라 반렵반농 상태에 있었고 야인의 경우 순수한 수렵에 가까웠습니다.(텃밭에도 간단한 농사를 짓는 수준의 농업을 하는 부족은 일부 있었을 겁니다)

    다만 해서 여진의 경우 몽골과의 혼혈이 심했고 영역도 바로 몽골의 유목지대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극히 일부 유목을 하는 이들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들도 역시 대부분은 반농반렵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한 번 농사를 지은 땅은 목초지로서의 가치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유목과 농경은 서로 공존하기 어렵습니다.(유목민과 농경민의 오랜 반목도 이런 이유가 가장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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