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가 즉위했을 당시 유럽의 상황은 전통적 강국이었던 프랑스와 신대륙 발견 이후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부를 감당 할 수 없을 정도였던 신흥 강국 스페인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네델란드와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들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었고 프랑스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었으며 영국으로 부터는 칼레를 빼앗은 상황이었죠. 영국처럼 고만 고만한 나라들은 어느 한쪽에 줄을 서서 편가르기를 해야 했고 엘리자베스 이전의 영국은 스페인이라는 동앗줄을 잡고 있었습니다. - 프랑스와 영국은 오랜 세월 적대 관계였습니다 - 그렇게 되니 당연히 프랑스는 영국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마지막 남은 교두보인 칼레를 쳐서 빼앗은 것이고요.
거기다 종교는 각 국가마다 정통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네델란드에서는 스페인의 영향하에 있었으면서도 프로테스탄트들이 들고 일어나 정통 카톨릭이자 스스로를 카톨릭의 수호자로까지 자처하는 펠리페2세의 심기를 어지럽게 만들었죠. 프랑스에서는 '성 바르톨레미오의 대학살' 이라 부르는 신교도 집단 학살 사건이 1572년에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 앙리 4세의 낭트칙령이 발표될때 까지 - 수십만의 사람들이 종교 분쟁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참고로 성 바르톨레미오의 날 하루 그 자리에서 5천의 신교도가 학살당했고 그 이후 이어진 여파로 7만의 신교도가 죽었습니다. 당시 인구를 생각해 본다면 거의 사람 도살이 일어났다고 보셔도 무방하죠.

영국 또한 이런 종교분쟁에서 자유롭지 못해서 엘리자베스의 영국은 신교국가였고 바로 옆의 스코틀렌드의 여왕이었던 메리는 카톨릭이었고 바로 그 위에 웨일즈는 또 신교인데 바로 붙어있는 북쪽 지역은 또 카톨릭 세력이 강한 상황이었죠. 엘리자베스가 종교적 화합을 외칠만도 한 상황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즉위했을때 전대 여왕이었던 블러디 메리의 살해 위협을 피해 갔던 신교도들은 엘리자베스가 즉위했을때 다시 돌아와 이번에는 엘리자베스에게 카톨릭을 죽여 버리자고 했고 열받은 엘리자베스가 그들을 물리칠 때 까지도 첨예하게 종교적 대립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유럽 특유의 가족 왕국성이 문제가 되어 프랑스 국왕과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자 스코틀랜드로 들어온 메리는 프랑스의 여왕의 직위와 영국의 왕위 계승권과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가지고 엘리자베스를 사사건건 무시하며 자신의 영국 왕위를 주장했고 덩달아 프랑스도 영국 대사가 올때마다 메리의 문장이 그려진 식기로 음식을 대접하며 메리의 영국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었고 스페인의 펠리페2세는 전대 메리와 결혼해 영국을 손에 넣어 보려다가 메리가 아이를 가지지 못하자 떠나 버리고서는 이제와서 처제인 엘리자베스에게 또 청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사실 유럽의 왕위는 나라는 달라도 서로가 연관고 얽혀 있어 프랑스 왕이 영국 왕이 될 수도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의 왕이 독일의 왕이 되기도 하고 혹은 스페인의 왕위를 가지기도 하고 또 어디 듣도보도 못한 조그만 국가의 수장이 난데없이 거대 제국의 정통 계승자가 되기도 하고 서로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덕분에 서로들 음모의 바다에서 서로를 잡아 내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던 것이었죠.
자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네델란드의 신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스페인의 펠리페2세는 분노했죠. 그래서 군대를 보내 진압하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겹쳐지면서 처음에는 신교의 종교적 권리를 위한 싸움이 네델란드의 독립 운동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거기다 스페인의 저지대 진출은 영국에게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실 네델란드에서 영국까지는 불과 백 몇십 킬로에 불과해 스페인이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영국은 턱 아래 칼날이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거기다 프랑스는 영국과 불과 40킬로정도 떨어진 칼레를 점령 한 이후 되돌려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죠. 힘 없는 영국으로서는 스페인과 프랑스간의 전쟁에 말려 들었다가 칼레가 떨어지고 둘 사이의 강화 조약에서 어떻게 하든 칼레를 돌려 받으려고 했지만 되려 꾸사리만 먹고 낙동강 오리알 신세 - 1568년 카토+캉브레지 조약 - 가 된 상황에 어제의 같은 편이던 스페인이 메리와의 결혼 관계가 실패하자 노골적으로 영국을 위협하면서 네델란드까지 점령하려고 하니 엘리자베스로서는 어떻게 하든 수를 써야 했습니다. 사실 이미 1568년 11월에 신대륙에서 오던 스페인의 수송선이 영국 선박에 해적질 당하면서 두 나라간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스페인이 자신과의 결혼이라는 로또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고 되도록 답변을 늦추면서 스페인의 도발을 막는 동시에 네델란드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죠. 사실 이미 이전에 프랑스의 신교도들을 지원하다가 프랑스 정부군과 위그노가 평화 협정을 맺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황을 만들어버린 예가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신중하게 그러나 신속하게 작업(?)을 진행 중이었죠. (좌측이 펠리페2세)
사실 스페인과 영국은 프랑스라는 대국을 상대로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마인드로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위의 몇가지 사건들로 양국간의 관계가 불편했지만 그래도 같은 적이 있어서 참고 있었던 거죠. 헌데 스페인과 프랑스가 평화 협정을 맺어 버렸고 스코틀랜드의 메리가 자신의 영국 왕위 획득을 도와 달라며 펠리페2세를 꼬드기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으로서는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이라는 수와 스코틀랜드의 메리 두가지를 모두 이용할 생각을 했습니다.
스페인은 영국이 강화 조약 이후로 결혼을 거절하자 메리라는 패를 이용하기를 결심하고 1571년 각료회의를 통해 영국 왕위에 메리를 앉힐 것을 결의합니다, 곪았던 감정이 폭발한거죠. 헌데 메리는 사실 엘리자베스만큼 신중하지도 못하고 똑똑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위치를 엘리자베스만큼 잘 이용하지를 못했죠. 헌데 욕심은 커서 엘리자베스의 즉위 이후 몇번의 반역 시도를 했었고 그때마다 실패했었습니다. 다만 엘리자베스는 왕의 권위는 신께서 부여한다는 마인드가 있어서 같은 왕위를 가진 메리를 처형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1586년의 노퍽의 공작이 메리와 비밀리에 결혼함과 동시에 영국 여왕에 추대하고 북부의 카톨릭을 규합한 다음 펠리페2세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켜 버렸습니다. 이것이 엔서니 베빙턴의 반란이죠. 하지만 반란은 강력한 진압에 의해 실패하고 신하들은 더이상 참을 수 없다면서 엘리자베스에게 메리의 처형을 적극적으로 권유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메리의 친아들이었던 스코틀랜드의 제임스조차 자신의 어머니에게 별다른 애정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 이때 메리는 영국에 억류중이었습니다, 몇번의 역모와 남편살해 혐의들로 인하여 영국에 연금되어 있었던 것이죠. - 결국 엘리자베스도 그녀를 두둔하지 못하고 처형에 승인한 뒤 1587년 2월 메리의 목을 베어 버렸습니다. (우측이 메리 Mary Stuart)
대신 엘리자베스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를 총애하여 이후 메리의 아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6세인 동시에 영국의 제임스1세가 되어 영국을 물려 받습니다. 이 제임스가 메리의 처형때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던 것은 메리에 대한 애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얼굴이 워낙에 반반했던 메리는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고 아들이었던 제임스에게는 별다른 애정을 보내지 않았던 것이죠. 사형이 확정되던 때 메리는 이러한 아들을 원망했지만 제임스로서는 정도 없는 이름만의 모친보다는 자신을 아껴주고 왕위까지 보장해 주었던 엘리자베스에게 더 이끌렸던 것입니다.
스코틀랜드라는 위치를 안정화 시키고 미흡하나마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낸 엘리자베스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스페인과의 대결을 위해 힘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미 이전부터 진행되어 온 일이지만 슬슬 전모가 확연해 지기 시작했던 것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