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세금
세금이라는 것은 다들 아시겠지만 한 나라를 지탱해 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세금이 많이 걷히면 대물빠들이 좋아라 하는 크고 웅장한 건물 올리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요. 헌데 말입니다, 유사한 시대 일본이나 중국등에 비하면 조선의 세금은 의외로 낮은 수준이었습니다. 일단 파고들면 다른 이야기를 못할 것도 아니지만 일단 공식적으로는요. 그래서 오늘은 세금에 대해 한번 이야기 해 보려고 합니다.

고등학교때 국사 교과서에서 배우는 내용인데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군요) 조선 초기에는 토지의 상태에 따라 전분육등법을 실시했습니다. 일단 400두를 생산할 수 있는 토지를 한결로 삼는데 토지의 질에 따라 400두를 생산할 수 있는 면적이 달라지기 떄문에 이를 여섯 등급으로 나누고 그 상태에 따라 세금을 걷는 것을 말하죠. 헌데 여기에 연분구등을 플러스 하게 되는데 암만 좋은 땅아리도 그해 기후에 따라 생산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각지의 수령에게 각 결로 묶인 토지의 산출에 따라 가장 좋은 등급에서 가장 낮은 등급까지 아홉으로 나눠 세금을 적절하게 거둬 들이는 것이지요.
다른 나라에서는 일정량의 토지에 일정량의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 주류였던 것을 생각하면 조선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다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이게 한 지역을 단위로 묶어서 세금을 걷는데다가 일일이 그해 파종부터 작황까지 몽땅 다 지방 수령이 조사해 보고해야 했기 떄문에 상등급 토지와 하등급 토지가 같은 세금을 내는 일도 생기고, 수령이 할 일이 너무 많아 정상적으로 조사 하기도 힘들고 또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반발 또한 심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작년에는 50석을 내라고 했다가 올해는 작황이 좋으니 60석을 내라고 하면 기분 좋으시겠어요? 거기다 지방의 이해 관계 또한 있는거고요. 결국 인조대에 이르면 "이것 저것 골치 아프다 썅~ 그냥 무조건 한 결당 4두만 내라" 로 변해 버립니다, 이게 영정법이죠.

헌데 이 연분구등의 세율이 어느 정도였느냐면 농사가 풍년인 해에 가장 좋은 토지에서 내야 할 세금이 한결당 20두, 가장 낮은 하하년에는 4두 정도였습니다. 한결당 생산할 수 있는 량이 400두니까 높아봐야 5% 낮으면 1%를 세금으로 냈던겁니다. 아마 지금 세율보다 낮은 수치죠. 지금 월급쟁이들이시라면 반색을 할 만한 세금이었던 겁니다.
<조선의 관리는 이것저것 빠쁘답니다>

허면 유사한 시기 일본은 어땠을까요? 사실 딱 같은 시기를 맞추지는 못합니다.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니까요. 일단 일본의 전국시대는 만날천날 전쟁하던 시기라 좀 그렇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통일한 에도시에의 기준으로 보자면 놀라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계급제를 철저하게 만들었던 이에야스라서 그런지 농민은 그야말로 "세금내는 짐승" 정도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는  "농민들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끔 잘 알아서 세금을 거두라." 라고 말할 정도였죠. 애초에 무기도 쥘 수 없고 다른 지역에 옮겨 살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농사 지어 사무라에게 바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둬들인 비율은 50%~70% 정도였지요. 한마디로 농사 지어서 자기 입에 먹을 것은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거기다 쌀이 현금처럼 쓰이는 쌀본위제였던 만큼 각 번주들은 쌀을 조금이라도 더 생산해 내기 위해 농민들을 닥달했고 각종 구황작물을 심을 공간도 쌀을 심느라 구황 작물은 생각하기도 힘들었죠. 이러다 보니 해방기가 관련된 향보, 텐메이 텐포 대기근떄 사망자가 (기록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최저와 최대를 기록하면) 최저 15만에서 최대 400만까지 굶어 죽어 나갔던 것입니다. 흔히 에도시대에 일본은 장삿꾼들 그러니까 상업력을 키워서 후대에 그렇게 발전했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실상을 보자면 각 번은 하나의 나라와 같아서 이동이 자유롭지 않으니 대부분 상인들을 이용해 거래를 했는데 이러다 보니 (워낙에 금액이 크다 보니) 사농공상의 하층인 상인들이 큰 돈을 만지고 크게 커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 이 인간 무서운 인간입니다. 대망 보고 좋아하지 마세요. 당신은 농민이 될 확률이 더 높음>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서 물론... 세금이 꼭 쌀만 내는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공납이라고 해서 각 지역의 특산물을 세금을 내는 경우도 있었죠. 사실 대부분의 폐단이 이 공납과 군포에서 나왔다고 할 만큼의 것들인데 그나마 측정이 쉬운 쌀에 비해 특산물은 세금 측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자기 지역의 특산물이 아님에도 자기 지역에 할당되어 무조건 납부해야 할 경우도 있었고 바로 전해에 몽땅 다 쓸어가서 별로 남지 않았음에도 올해에 똑같은 량을 또 내라고 해서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군포도 마찬가지, 알다시피 군대가기 싫으면 군포를 내라는 것인데 군대 비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죠. 조선에서는 쌀과 함께 베도 현금처럼 쓰이곤 했는데 조선은 일종의 징병제를 택하고 있는 바, 거의 대부분의 양인은 군역을 져야 했습니다. 헌데 군대에 나가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기죠. 그리고 군대는 주는 것 없이 빡세기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띠바~ 군대 안가는 방법 없나?" 라고 하니 "그럼 돈 좀 내라, 빼줄꼐" 라고 한거죠, 그게 방군수포 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불법인 것이 하도 만연하니까 중종때에는 군적수포라고 공식적으로 돈 주고 군대 빼는 제도가 생긴거죠.


자 헌데 위의 두가지 세금은 직접세가 아니라 일종의 간접세였습니다. 일단 쌀은 농민들이 먹고 살아야 하고 다음해 파종을 위한 것도 있어야 하니 중앙집권제의 국가에서 조금이라도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막장으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세금을 더 거둘 공간은 바로 이 간접세에 있는 것이죠. 지금도 직접세를 올리는 것 보다 콜라같은 물건에 세금을 붙이는 간접세야 말로 야금야금 세금 거둘 메인 링이나 마찬가지죠?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라 평시에는 그나마 괜찮은데 임진란과 병자란을 겪으면서 나라에 세금이 부족하니 이 간접세를 메인으로 삼은 것입니다.

원래는 세금이 아닌 것이 세금화 되었고 나라 제정이 어려운 전후에 이것을 집중적으로 긁어내다 보니 각종 폐딴이 쌓여버린 것입니다. 아이에게도 군포를 물리고 죽은 사람도 사망 처리를 안하고 군포를 물리고... 이러니 조선의 민란은 주로 이 간접세로 인한 민란들이 많았지요. 소위 삼정의 문란이라는 것들 말입니다.
<무섭다! 삼정의 문란!!>

그렇다면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책들이 나오지 않을리 없죠. 특히나 조선은 백성에 대한 정책들을 꽤나 신경쓴 만큼 위정자라면 유학적 이념하에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물론 이론상! 뒤에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언제나 이론과 실제의 괴리는 참 난감하죠) 그래서 일단 공납의 폐단을 없에기 위해 아예 몽땅 다 쌀로 내라는 대동법이 실시됩니다. 시작은 임란 이후 류성룡의 제안으로 결당 2말을 내는 것으로 했는데 너무 낮은 세율 때문에 이익이 없자 폐지해 버렸다가 다시 광해군때 한백겸과 이원익에 의해 살아났다가 인조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자리를 잡게 되죠.

처음 류성룡이 제안했을 때 결당 2두 였던것이 광해군때 봄과 가을에 결당 8두로 그러다가 몇번의 변화 과정을 거치고 결당 12두로 통일되게 거둬 들입니다. 이 대동법의 실시로 농민들의 부담은 크게 줄어들게 되죠 물론 토지 지주들은 난데없이 토지세를 내는 형태가 되다보니 반대를 했지만 말입니다. (주로 대지주였던 서인들) 그럼 군포는 어떨까요? 중종떄 공식적으로 내는 군적수포 실시로 한해 베 두필 정도가 공식적이었습니다. 별로 부담스러운 일은 아니었쬬. 문제는 언제, 누구에게 내는 것이 공식화 되지 않았던지라 오군영에 두필, 지방관청에 두 필, 조정이 두필... 이러다 보니 공식 두 필이 실제로는 몇십필에 이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니 민란이 안날 수가 있나요? 그리고 중앙관리들도 당연히 이 문제점을 인지하는 바. 영조때에 중앙에 한하여 딱 한필로 정해지는 균역법이 시행됩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개선의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이지요.


그렇다면 조선 농민들이 한해 부담해야 하는 세금은 전부해서 얼마나 되었을까요? 조선 후기를 기준으로 보자면 일단 공식적 세금이 400두당 4두로 1%, 그리고 공납대신 쌀로내는 대동법으로 내는 양이 12두 정도로 약 3% 정도, 군납으로 나가는 베를 쌀로 환산할 경우 현종때 김시진이 올린 장계에 따른 비율로 보면 베 한필당 쌀 5두~7두 사이. 그러니까 한 집안 장정 네명을 기준으로 2필 기준 55두. (물론 뒤로가면 또 줄어들어 버립니다 25두 정도로) 가장 높은 상태로 계산하면 16% 정도의 세금. 결국 다 합하면 대략 20~25% 많은것만 골라서 계산한다 해도 30%를 넘지 않는 세금인 것입니다.

자~ 조선은 바로 이 20~30%의 세금으로 국가를 운영하던 나라였던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대규모 공공 사업은 사실 하기가 힘들죠. 농민을 착취하면 조선은 중앙집권의 위력으로 거대 건축물은 우습지도 않았을 겁니다. 허나 유교적 공민이념으로 무장된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던 것이지요. 일본처럼 50%는 기본이고 쫙쫙 기름을 짜내 70%까지 거둬들여 백성들이 몇백만이 굶어 죽는 사태가 벌이지기도 하는 상황과 비교하면 참 대단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흉년때 조선은 구휼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요.
<공식적으로는 크게 부담이 없는... 그러나 언제나...>


헌데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그럼 조선에서 일어난 각종 민란들은 뭐냐?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이상과 실제의 괴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중앙집권제 국가라고 하지만 조선의 임금은 신하들에 의해 상당히 제약받는 편이었습니다. (동시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그리고 각 지방의 향반들도 나름 대단한 위세를 떨쳤죠. 이러다 보니 관리가 제대로 정신머리 박힌 사람이라면 조선은 그야말로 지상천국(?)이 되는 것이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요? 권력과 재산을 탐하는 관리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이들이 지방의 향반들과 결탁해 자신의 세력을 키워가면서 농민을 비공식적으로 착취하는게 중앙으로 들어가는 세금보다 훨씬 많았던 것입니다.

거기다 향리! 고려시대만 해도 월급받는 관리이던 향리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급여가 사라져 버리다 보니 향리들은 세금을 거둬들인 것에 자신의 몫을 떼어 먹고살 수 밖에 없었죠. 이것도 적당히 떼어 먹으면 별 무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떡을 먹으면 떡고물이 묻기 마련이고 돈을 보면 더 많은것을 탐내기 마련이죠. 향리들은 이런 떡을 만지면서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농민들은 세금을 내다가 허리가 휘어질 판이었죠. 탐관오리 하나가 지방관으로 오면 그 사람의 임기동안 탈탈 털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의 왕권이 강해지고 권력 구조의 기강이 바로 설 때는 백성들은 아주 편하게 농사 지으며 살 수 있었고 중앙집권화가 약해지면 부정 부패가 생기고 농민들은 죽어나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죠. 이러다 보니 민란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선의 민란을 살펴보면 대부분 세도정치로 기강이 문란해지는 경우였고 민란의 성격을 봐도 국가전복을 위한다던가 단순히 쌀만 내놔라 하기 보다 지방관을 갈아라는 정도가 상당부분이었습니다. 즉 제대로 된 관리만 오면 삶이 달라진다는거죠.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특히 19세기 이후의 민란을 보면)


조선에 대해 살펴보면 살펴볼 수록 조선의 정치 이념이나 행정구조는 오히려 지금보다 낫다는 생각을 할떄도 많습니다. 물론 민주주의 시대와 조선시대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조선이 행했던 애민정책들은 동시대 어떤 국가보다도 훌륭했다고 자부할 수 있지요. 만약 조선의 왕이 개인과 왕조의 영달만을 생각해 강력하게 백성을 통제하고 세금을 거둬 들였다면 거대빠들이 좋아라 할 것들이 조선 곳곳에 생겼을 것입니다만 과연 자신이 상위 10%의 권력자에 속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정도 능력이라면 거대빠로 자위하는 것에 앞서 지금도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과연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일까? 등등을 생각하게 됩니다.

by 아빠늑대 | 2009/11/01 22:34 | 역 사 | 트랙백(1) | 덧글(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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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조선의 세금, 조선의 농민
조선의 세금 이 글은 다소 기묘한 글이다. 이 글이 단순히 조선의 세금을 논하기 위한 글이라면 이런 평가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글은 결국 조선의 농민 생활을 논하고 있다. 글을 따라가면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에 비해서 그다지 높지 않은 조세부담을 지고 있는 전근대 농민을 마주칠 것이다. 그런데 그 농민은 대체 어떤 농민인가? 이 글에는 그 농민이 자작농이라는 가정이 (아마도 비의도적으로) 숨겨져 있다. 국정교......more

Commented by 발산과 수렴 at 2009/11/01 22:41
근데 특정 역사 빠들은 조선 존나 까대자나...안될거야...아마...

어휴... 참

답이 없습니다...ㅠㅠ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1:03
조선을 까는 경우 500년의 역사 중 어디를 까야 하는가를 잊은 경우가 대부분이더군요. 항상 좋지야 않지만 안좋은 것만 골라내면 500년은 너무나 꺼리가 많습니다
Commented by rumic71 at 2009/11/01 22:48
에도시대 '잇키'도 비슷했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서 의외로 글을 읽는 농민이 많았구나 하고 엉뚱한 데에서 놀란 기억이.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1:02
사실 대부분 주도하는 몇몇은 식자층일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잇키와 민란이 쪼끔 다른 부분은 잇키의 경우 대상이 번이고 그 번은 사실상 하나의 국가와 같았다는 사실이지 않겠습니까.
Commented by rumic71 at 2009/11/02 01:28
모모야마 이전까지는 확실히 하나의 국가로 보아도 좋았겠지만, 에도 막부는 참근교대니 뭐니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실질적으로 각 번을 틀어쥐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막말로 가면야 막부가 있으나마나가 되어버리지만.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1:46
네, 그렇다 하더라도 하층 농민에게 있어는 번은 번이겠지요. 번을 틀어쥐고 강력하게 제어하는 것과 아예 중앙집권화 되어 지방관이 파견되는 것은 다르니 말입니다.
Commented by R쟈쟈 at 2009/11/01 22:57
저는 그런점에서 조선보다 동시대 일본이나 중국&유럽이 낫다는 의견이 좀 이해가 안갈때가 많습니다=ㅁ=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1:01
많은 경우 조선 시대를 50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전과 후를 비교한다던가 구한말과 중흥기를 비교한다든가 하는 경우에서 나오는 것이 많은 것 같더군요. 물론 우리께 무조건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서도요.
Commented by 해색주 at 2009/11/01 23:06
아마도 정규 학교에서 역사를 배운 사람들은 화려했던 이전의 역사에 비해서 너무나도 얌전한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 수치심을 느꼈을 겁니다. 근데 이 조선이라는 나라가 의외로 씹으면 씹을 수록 향이 빼어납니다. 끈질긴 생명력과 그 시스템 말이지요. 지금보다 시스템은 오히려 더 나은 것 같은데, 중앙권력이 약해지면 동시에 나라가 도탄에 빠지는 문제점과 연약한 군사력은 두고두고 말이 될듯 합니다. 조선이 지금의 한국처럼 무장 출신들이 권력을 잡고 강력한 군사 시스템을 유지했다면, 아사한 사람들이 많았겠지요. 고려의 전성기에 전방에 20만을 후방에 20만을 깔아두고 요나라와 전면전을 벌일려면 얼마나 많은 국가재정이 소모가 되었을까요? 조선의 시스템이 문제가 많다지만, 완벽한 관료제를 이뤘다는 명나라보다 오래 간것을 보면 나름 쓸만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0:59
단순히 무장들이 권력을 잡는다고 국방이 강해지지야 않겠죠. 역시 국방력은 주변에 강력한 적이 있어야 덩달아 강해지는건데 조선시대는 의외로 평화로웠던지라 그럴 수 밖에 없었지요. 따져보면 군사력을 수치화 한다면 그다지 딸리는 편이 아니지요
Commented by 카니발 at 2009/11/01 23:15
저같은 수험생들에게 매우 유용한 포스팅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조선은 정말 알면 알수록 대단한 나라네요. 국사 교과서에서 좀 더 자세히 서술해주면 좋았을지도...




물론 많은 학생들이 지금 국사도 양 많다고 눈물 흘리니 무리겠지만요[...]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0:48
지금 것도 자세히 나온게 아닙니다. 세제 하나면 빼도 책 한권은 나올껄요? 거기대 시대별로, 지역별로도 따져야 하고... 어디까지나 제 블로그 포스팅은 맛보기 일 뿐입니다. ^^
Commented by Niveus at 2009/11/01 23:15
뭐 시스템만 놓고보면 조선은 동시대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나라중 하나죠(...)
문제는 그 시스템이 제대로 발현될때가 더 적었다는게 문제(;;;)
시스템은 괜찮았는데 중앙에서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병신되고 그 중앙이 병신되면 그대로 전국이 병신되는 상황이 이어지게 되는걸 보면 시스템만능주의는 이래서 안되는구나 싶습니다 -_-;;;
그리고 해색주님 말씀보면 약한 군사력이라고 하지만 의외로 약하다고 폄하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약하지도 않았지만 강하지도 않았다 라고 해야할까요.
병력동원규모등 생각해보면 의외로 무지막지한 규모를 자랑하는 조선군입니다 ^^;;;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0:47
제대로 발현되는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적어도 일본처럼 '죽지 않을 만큼만 남겨라' 하는 것 보다야 낫겠죠. 병력동원 규모야... 징병제인 만큼... 문제는 역시 시의적절한 시기에 계획대로 되어 주느냐의 문제죠. 헌데...군사력이 약하다고 하지 않았는데...어디서...?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0:48
아~ 해색주님이 말씀하신 덧글 말이로군요... 답글을 거꾸로 달다보니 ^^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9/11/01 23:18
잘 읽고 갑니다. ^^ 다만, 저 역시 조선까는 아니지만, 당시 조선의 세제 행정(특히 조선 후기)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도 고려해야하는 측면이 여러개 있다고 봅니다.

1-1. 세금의 운송을 위해 관찰사나 해당 군현의 수령이 특설(설권)할 수 있는 잡세의 여부가 있습니다.

1-2. 상인 및 장터의 물건팔이들에게 적용되는 장세 및 포구세의 경우는 중앙에서 정식으로 제정한 세금이 아니고, 당시 관찰사의 권한에 의해 그 세율이 조정될 수 있는 세금이었습니다. 이러한 '상업세'의 여부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2. 대동세는 사실 쌀로만 납부하는 지역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호남의 산군과 영남의 산군에 적용되는 '포세납 지역'을 무시할 수 없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포와 쌀의 가격대비가 언제나 일정하지 않기에 정식의 세율과 다르게 물가의 당락에 따라 농민들의 부담분이 줄어들수도, 역으로 늘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이는 호남 산군 대동법의 실시과정에서도 문제로 지적되어, 중앙에서 끓임없이 교환율을 제정해주려 시도하던 상황이기도 합니다.)

3. 세금이 화폐가 아닌 쌀과 포의 납부도 허용되는 경우에는, 지방 관청이 농민에게 양질의 미곡이나 포만을 받으려 하고, 농민에게 거두어들인 양질의 미곡과 포를, 시장의 매매를 통해서 질이 낮은 것으로 바꾸어 그 차익을 챙기는 '무매(貿賣)'의 관행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행을 중앙정부에서도 인정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실제 세금납부액 보다도 더한 시장가치를 가질 수 있는 현물을 납부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현물 대신 화폐로 납부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 역시 조선조정에서도 권장하던 사항이기도 하죠. 그러나 당시 18세기의 '전황'을 생각할때 다수 농민들이 화폐에 접근하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4. 그리고 정식의 세금으로 계산되지는 않지만, 지방관청에서 '지방세'가 별도로 없는 관계로(대동세 유치미가 있긴 합니다만, 이 비율을 호조에서 줄여나갑니다.) 운영하는 환곡-식리의 문제입니다. 사실상 지방관청은 이러한 환곡에 대한 이자(耗穀)를 통해 지방재정을 꾸려나가고 있었고 이는 당시 세금 못지 않은 폐단과 강제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례로 중국의 경우 환곡의 문제야 국가가 아니라 지역사회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사창(社倉)으로 넘어간지 오래기에 환곡의 부분에 있어서는 조선의 농민들보다 유여한 위치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고려되어야 당시 조선 시기의 농민들의 부담은 얼마나 되며, 어떠한 성격이었는지에 대한 종합적인 입론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0:43
정확하게 고려해야 한다면 그야말로 답은 없겠쬬. 당장 사족에 의한 고리대와 자영농의 몰락만 생각해도 문제가 엄청나 지니까요. 부정 부패에 대한 생각은 위에도 말씀드렸지요. 사실 그렇게 더 따져나가면 타국의 농민들의 삶은 정말 암담해 집니다. 중국의 사창을 본다면 역시나 상당한 부담의 이율을 보지 않을 수 없죠, 그리고 또한 지역의 수장에 의한 변률도 봐야하고요. 오히려 조선은 사창제도에서 생기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개혁이 있었음을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당장 공식적 세율에 의한 부담 + 여타 부대비용 ... 이 두가지 중 공식적인 것이 엄청나게 큰 것들은 그야말로 생존만 가능케 한 것이지요. 나머지는 사회적 현상이고요. 타국의 경우를 고려한다면 부대비용은 그야말로 "긁어낼 것이 없어서 그정도만" 이라는 것도 성립해 버리지요.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1:20
환곡의 문제를 등한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대로 환곡 문제로 고종 이전까지 민란의 원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지요. 하지만 조선시대 내내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없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하겠지요. 또한 지방제정을 위한 관둔전이 그 확대와 더불어 중앙 제정을 압박하는 형태로 나오면서 시행과 폐지를 거듭한 사실을 연관시켜 보았을 때 후대 환곡 또한 지방관의 관리능력을 위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조적인 문제라고 말한다면 그리 볼수도 있지만 역시 조선 500년 동안 같은 상황만 계속 이어진 것이 아님을 생각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환곡개혁의 목적이 국가관리의 문제점과 지방 비리에서 발단된 것인만큼 그것을 사창으로 전환하는 것은 사창제의 훌륭함에 의해서라기 보다 케인즈냐 하이예크냐의 경우처럼 상황에 따른 선택적 취사라 보고 있습니다. 구한말처럼 중국의 사창제도 근대 개혁 대상에 포함되는 것인만큼 그것이 우월하다고는 할 수 없겠찌요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9/11/02 01:21
말씀하신대로 다수의 문제는 '향리의 부패' 혹은 운영상의 문제로 자잘한 문제로 돌릴 수 있겠습니다만,

환곡의 문제는 실제 부세 가운데 중 하나로 간주되다시피하고, 당시 국가 역시 환총록을 만들어, 어느 지역에는 어느 정도만큼 환곡을 대여하라는 정례가 정해져 있고, 이에 따른 이자수익이 얼마인지를 미리 환총-정액으로 관리할 정도이며, 나아가 실제 농민들이 폐단으로 지적한 삼정에 포함될 정도입니다.
(실제로 조선 후기 환곡에 대한 논의는 매우 중요한 사안 중에 하나이며, 김옥근, 장동표 등의 선학들도 18세기 이후 지방재정의 운영과 그 재원은, '환곡의 부세화'가 이루어져 환곡이 거의 전부라고 볼 정도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적어도 환곡에 대한 고려는 단순히 '모든 사항을 고려하면 답이 안나오는 문제'로서의 '자잘한 문제'가 아니라, 조선시대 부세를 고려하면서 '당연히 고려대상에 넣어야 할 문제'이며, 말씀하신 '공식적 세율에 의한 부담'으로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앙정부조차도 결국 인정해버리고 비총제 하에 포함시켜 그 이자수익 자체를 정액으로 책정해 버리는 것이니깐요.

또한 그러한 환곡의 '강제 불하'라는 것이 단순한 관리의 부패 때문인지, 아니면 수조권 체제 붕괴 후 관둔전이 유명무실화된 상황에서 지방재정이 없거나 부족한 '조선 행정에서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인지도 고려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어서 입니다. 즉 문제의 원인이 단순한 운영상의 문제(즉 부패등의)가 아니라 시스템적 결손에 의해 생긴 것이라면 그 문제점도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더욱이 중국의 사창제가 말씀하신대로 수탈의 양상이 조선보다 심한 것이었는지도 의문입니다. 실제로 당시 실학자들 뿐만이 아니라 송시열 같은 보수파 조차도 환곡은 사창으로 바뀌는게 이상이라고 파악할 정도였으며, 실제로 대원군 시기의 환곡개혁은 바로 이런 사창제로의 전환이었으니깐요. 말씀하신대로 중국의 사창제가 수탈적이었다면, 당시의 정론가들의 논의나 선택에 대해서 달리 해명할 길이 없습니다.

더욱이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환곡제도는 지방관청이 자신의 재원운용을 위해 강제적으로 부과할 수 있었지만 사창제는 그러한 강제성을 부과할 수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정론가들이 지적하는 사항중의 하나죠. 즉 사창제 하에서의 부담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자신이 선택할 최소한의 여지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중국의 사례도 지역 유지의 권력에 따라 말씀하신 변률이 존재합니다. 특히 명대 토사의 문제점 중 하나가 바로 그러한 불법성이었으니깐요. 하지만 그 여부는 지역간 편차가 있는 반면에, 조선의 경우는 지방재정 교부금이 대동세 유치미 이후 유명무실해짐에 따라 '왠만한 지방'들은 강제적으로 부여하는 성격의 것이었다는 것이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각설하고, 전반적으로 보았을때 제가 제기한 문제의 다수는 '운용상'의 문제가 개입되어 '향리의 농간-부패'로 돌릴 수 있겠지만, 적어도 환곡의 문제는 보다 충원한 논의가 부가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9/11/02 01:25
일단 오타 수정을 위해 댓글을 지웠다가 다시 붙인 것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말씀하신대로 환곡 개혁의 과정은 언제나 있어왔고, 그러한 과정은 송찬섭 선생님의 연구에서도 충분히 드러나는 것이지만, 결국 환곡 자체가 부세화 되었다는 귀결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환곡의 문제는 단순히 지방관의 관리능력만으로 돌리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일단 『부역실총』 등의 총서류 발간을 통해 수탈을 막고 세액을 정례화하려는 시도는 조선왕조의 치밀한 노력 중의 하나입니다만, 그 가운데서 결국 환곡이 하나의 이익 재원으로 인정되어 규정된다는 것은, 지방관의 능력 여하와 관계 없이 사실상의 부세로 간주 되는 귀결에 대한 논의가 아닐가 싶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사창제 개혁은 그 자체가 가지는 개혁보다는, 결국 근대적 재정체계로의 이행에 따른 부속적인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죠. 즉 사창 자체가 문제가 되어 그것을 다른 형태로 계승하거나 '공공성'을 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재정체계의 확립과 함께, '개선'이 '소멸'되는 것이며, 이는 비단 사창뿐만이 아니라 모든 조세제도와 부역이 포괄되는 범주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1:43
환곡이 실질적으로 부세화 된 것을 규정한다면 역시 그 문제를 등한시 할 수는 없겠찌요. 일단 제가 전문 연구자가 아니라서 개인의 생각 정도로 치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일단 환곡이 후대에 제정 충당을 위한 세금화 된 사실을 무시하지는 않으나 환곡의 폐단이 세금화 된 자체에서 나왔다기 보다 아전과 관리 그리고 지방 유지가 결탁 이익을 위한 돈놀이의 수단으로 전용된 것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죠. 예를들면 전출하는 것이나 포음 결손에 대한 무리한 징수, 그리고 이중장부들... 물론 아주 후대로 가면 지방 제정을 너무나 이것에 의존해 가면 이자 때문에 백징까지 가는 막장이 연출됩니다만 이건 19세기 이후 곪아버린 상황이기 떄문에 상,중,하로 나눠 구분해 줘야 한다고 봅니다.

중국의 사창 문제는... 으흠...제가 알고 있는것과 달르고 아는게 짧아서 뭐라 더는 이야기를 못하겠네요 ^^;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9/11/02 02:56
말씀하신대로 환곡자체의 변질(포흠의 개입으로 인한 허부화)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하고, 그것은 시기별로 추이를 구분해야 한다는 점 역시 공감합니다.^^

다만 환곡에 대해서 정식 세금 못지 않은 부세화, 그리고 부패의 차원이 아닌 지방관청의 재정구조면의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아닌 노파심이 있었지만, 논의를 길게 끌고 중지를 흐린듯 하여 송구스럴 따름입니다.

그리고 사창의 문제는 일종의 반례로 제시하고자 하였는데, 사실 토의의 사항과는 큰 관련이 없는 것이니....오히려 제가 제기하고는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친절히 답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15:32
특히나 후기로 가면 지방 제정을 너무나 환곡에 의지한 것, 그리고 그것이 환란 이후 국가 제정의 결핍이 원인이라고 본다면 단순히 적은 세율이 결코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말씀처럼 부가 세금적 성격 때문에 고통이 생겼습니다만 일단 위에 쓴 글은 간략한 글인지라 역시 거시형태의 개론만 소개하니 그런 문제가 없을 수가 없네요. ^^;

아무튼 즐겁게 이야기 했습니다 .간만에 즐거웠네요
Commented by FELIX at 2009/11/01 23:25
사실 19세기 민란들의 실체도 원님을 고을 밖으로 내 쫓는 수준이었지요.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0:37
후대 간간히 정권이나 정치 방향까지 말하는 민란들이 생겨나서 말이죠
Commented by 천지화랑 at 2009/11/01 23:35
광무개혁이 괜히 전제황권을 추구한 게 아니었겠죠 -_-;;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0:37
사실 사회라는 것이 전제황권이라 해도 기반이 부족해 제대로 되어을란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대가리가 그다지...) 어쨌거나 안정된 시스템이라면 많이 달리볼 수도 있겠죠
Commented by 윙후사르 at 2009/11/01 23:39
FELIX// 거기서 조금 심한게 향리 몇놈 죽이기. 그리고 참고로 소작료란 물건도 고려를 해야되지요. 소작료가 대체적으로 4~5할이니 그렇게 하면 조선 농민은 순수 소작농일시 대략 자신의 수확량에서 3~4할이 남습니다. 단 자작 겸 소작이 대다수인것을 감안하면 실제 남는양은 더 되겠지요. 그러나 일본 농민은.....................(합법세금만 못해도 5할인걸 기억합시다.)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0:36
네, 이렇게 저렇게 들어가는 것이나 지방관의 횡포... 그리고 고리대 같은것들도 다 치면 골치아파지죠. 하지만 조선 시대 내내 그런 폐단에 대해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본다면 좌절스러운게 아니지 싶습니다. 일단 일본 농민은 "죽지않을 정도"만으로 착취를 당했으니 말입니다
Commented by zert at 2009/11/01 23:45
성리학 자체가 사회자체적으로 도덕적으로 "군자"에 가깝도록 지배자들을 만들어 내도록 강제하는 학문이었고...딴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조선의 전시동원능력도 현대와 비교해도 전혀 손상이 없습니다. 오히려 연락수단, 교통수단이 부족한 과거임을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죠.

괜히 16~18세기에(전쟁시 제외) 태어날 수 있는 나라를 고르라면 조선을 고르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최소한 굶어죽지는 않으니까요.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0:34
사회 환경이 따라주지 못해서 이상에 그친 것들도 있스빈다만 나름 타이트 하게 운영했을 경우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되지요. 실제 임란당시 왜군이 흥했던 시기를 보면 불과 1년도 되지 않을 기간입니다만... 너무 낮게봐요 조선을.
Commented by 하이버니안 at 2009/11/01 23:59
글쎄요... 중앙에 가져가는 세금만 가지고 국가 예산이라고 한다면 지방 하위 공무원 아전들이 먹고 사는 비용은 어떻게 계산해야 할까요.
백성을 수탈하는 나쁜 이방의 이미지가 강하긴 하지만, 아전에게 주는 월급이 거의 없었던 상황에서 자구책 마련은 당연한데,
그걸 뺀 20~30%만 국가 예산이라는 건 좀...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0:32
자구책 수준이라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국가 예산으로 내는 세금을 다 해도 20%선인데 아전의 자구책이 예산보다 많을까요? 몇 두 정도의 수준입니다. 문제는 그게 딱 정해진 것이 아니다 보니 자기들 멋대로 횡포를 부려서 그런거지요. 지방관이 청렴하거나 규율을 엄히 하면 이 문제는 해결되지만 그러지 않으면 폐단이 나오죠. 위에 한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Commented by 희야♡ at 2009/11/02 00:00
역시 조선은 알면알수록 무서워요...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0:31
인간사회인 이상 여러가지가 있지만 상당히 문명화된 나라였습지요
Commented by asianote at 2009/11/02 00:04
하지만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조선은 19세기 조선!!! 뉴라이트에게 조선은 문명 후진국!!!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0:31
19세기 조선에서도 구한말만 기억하죠
Commented by 침묵제독 at 2009/11/02 00:06
교과서 내용대로라면, 결은 (최대)생산량 300두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토지 1결당 세금은 20.2두라고 기계적으로 외우게 하는 곳도 있더군요.
물론, 20.2두의 세부내용도 가르치긴 하지만..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00:30
얼라? 300두를 기준으로 나오나요? 결당 생산량이 각 시대별로 변하는지라 전 400두로 알고 있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요? 좀 더 찾아봐야겠네요
Commented by 上杉謙信 at 2009/11/02 02:36
저런 세금으로 국가를 운영할수있을까하고 고민도 해봤는데... 생각해보니 조선군은 둔전이 딸려있었잖아요 ...

조선군말고도 다른 국가기구에도 논밭이 딸려있는경우가 있었나요??
Commented by 천지화랑 at 2009/11/02 10:23
북'조선'군이 있죠[랄라~]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9/11/02 13:42
원래 고려시대부터 각 관청에는 공해전이 있어 지방관청의 수요를 충당하도록 하였고, 조선시대에도 이를 계승하여 각 지방관청의 경우는 관둔전, 역참의 경우는 역둔전이 있어 말씀하신 '논밭이 딸려있는 경우'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수의 둔전은 '소유권'이 지방관청 혹은 역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토지에서 세금을 거둘수 있는 권한인 '수조권'을 지방관청에 불하한 경우가 상당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오면 수조권 체제가 사실상 붕괴해버림에 따라, 다수의 관둔과 역둔을 통한 비용 충당이 무실화되게 되죠.

둔전의 내용과 실제 운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송양섭 선생님의 글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15:34
위에 들꽃향기님이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만 양란 이후 중앙 정부의 제정 압박이 심해지면서 면세가 이루어지는 공해전과 같은 것을 확 축소해 버리죠. 당연히 지방은 제정이 궁핍해지고 그러다 보니 환곡 같은걸로 제정을 충당하려 하니 문제가 생긴 것이었쬬.

역시 자세한 것은 전문 서적을 읽어 보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
Commented by 소시민 at 2009/11/02 09:02
어렸을때 백골징포를 처음 들었을때 정말 ㅎㄷㄷ했죠...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15:35
각종 법에 나와있지 않은 명목의 세금들로 인해 문제가 심각해졌죠. 사실 중앙정부가 단호하고 강력하게 단속하면서 중앙정부로 들어가는 세금을 더 거둬 지방에 불하하는 방식이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더군요
Commented by bullgorm at 2009/11/02 09:25
언제나 삥땅치는 놈들이 문제..

우리나라에서는 항상 룰이 문제라기보다는
고래로부터 그 룰을 벗겨먹으려는 놈들이 문제였었죠..

이 것도 일종의 민족성이랄까..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15:36
문제가 없지는 않았어요. 향리의 경우도 공식적인 봉급이 없었으니 세금에서 제 몫을 뗴어낼 수 밖에 없고 비공식적이다 보니 정해진 비율이 없어 폭리를 거들떄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 후기에 가면 부자 향리들도 나오는 것은 죄다 그런 탓이죠. 너무 이상에만 집착한 면도 있어요
Commented by 하이버니안 at 2009/11/02 10:08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조선 후기가 되면 비총법이라고 해서 세수 총액을 미리 정해놓고 각 지방에 할당 배정했다고 알고 있고,
군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각 군현에 군포 징수량을 할당 배정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 시기엔 중앙에서 지방에 지나친 세금을 요구하는 경우(가령 50명 장정이 있는 마을에 200명 군포를 요구하는)가 있지 않았나요?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15:38
시기별로 중앙정부의 제정이 악화되는 경우 과도한 세금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지요. 공납의 경우만 해도 전해에 나무를 몽땅 베어가 놓고 올해 다시 그만큼을 요구하기도 한 기록이 있으니 말입니다. (나무는 한두해로 자라지는 않지요, 모르지는 않을것이건만 그리 무리하게 책정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조선 내내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애쓴 노력이 실록에는 자주 나타나죠. 그걸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Commented by deokbusin at 2009/11/02 13:11
1. 전국시대의 일본영주들 징수율은 칠공삼민(七公三民), 그러니까 영주가 수확량의 7할을 가져갑니다. 타케다나 우에스기가 대단했던 것은 남들이 칠공삼민할때 다른 징세수단을 개척해서 오공오민을 유지했다는 겁니다.

2. 토쿠가와 직할령인 천령(天領)의 공식적인 징세율은 사공육민, 그러니까 농민은 수확량의 4할을 막부에 납부하면 됩니다. 이것도 재정이 풍족하던 시기의 일이고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후기로 가면 징세율이 조금 더 올라갑니다만, 그래도 오공오민 그 이상은 자제했다더군요.--;

정이대장군 직속영지 외의 다른 번의 징수율은 오공오민만 해도 "선정"이라는 소리가 나옵니다. 참근교대 등등으로 돈 쓸곳이 많았기 때문에 평화시대인데도 전국시대마냥 칠공삼민은 기본이고 친번들 중에서 필두라는 기슈 토쿠가와 가문의 경우 지위가 지위다보니 유별나게 돈을 써야 될 곳도 많아서 무려 팔공이민까지 올라가죠.--;;;

여기까지는 시바 료타로의 글에서 뽑은 겁니다만, <大名의 일본지도>에서 명군이라는 소리를 듣는 영주들의 시책이라고 나열하는 걸 보면 조선왕국과 별 차이가 없더군요. 단지 세부사항으로 가면 상공업으로 돈벌이하여 재정적자를 메우고, 낙태하지 말라고 양육비 지급하는 정도로 미묘하게 다를 뿐입니다.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15:40
사실 중세시대 애민정책은 어느정도 비슷한 면을 보일 수 밖에 없죠. 쌀 본위로 나가는 사회에서 말입니다. 조선도 지역에 따라 쌀 생산량이 적은 곳은 대체품을 대신 내도 되는 유연함을 보이기도 했고 12두의 쌀이 4두로 점차 줄어들 듯 지방의 요구에 부응하는 경우도 많았죠. 문제는 너무 이러다 보니 중앙의 세금 문제가 꽤나 심각해진 경우도 생겨벼렀지만 말입니다. ^^
Commented by 세토 at 2009/11/02 19:00
몇 달 전 군에 있을때 봤던 건데 조금 관련있는 것 같아서 링크해봅니다. (http://kookbang.dema.mil.kr/kdd/GisaView.jsp?menuCd=2004&menuSeq=46&menuCnt=30917&writeDate=20091102&kindSeq=1&writeDateChk=20090721)

출전이 어딘진 몰라도 포스가 철철 넘치는 말이네요. "죽지 않을 만큼, 그러나 다른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악착같이 긁어내라."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22:15
일본 대기근 이야기로군요. 죽어나간 사람들... 특히 오지의 농민들은 생존 자체가 전쟁이었다고 하더군요. 당시 인구에서 400만이라면... 후덜덜이죠
Commented by 어릿광대 at 2009/11/02 19:50
확실히 좋은 제도 같은데 왕권이 강할때는 삥땅(...)치기가 어려운데 반대일경우에는...
좋은 정책이어도 실행하는 사람이 중간에서 가로채거나(...) 잘못 실행되면 안습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22:16
현대라면 조직적 감시 시스템과 탄탄한 행정구조 덕분에 그나마 좀 덜 하지만 그때는 그런게 없으니 마치 날고 싶다는 이상에 그냥 날개 모양을 붙여 노력한 것과 비슷한 경우도 있었죠
Commented by 明智光秀 at 2009/11/02 21:25
"대망 보고 좋아하지 마세요. 당신은 농민이 될 확률이 더 높음"
-> 내 말이 딱 이거란께롱~!!
Commented by 아빠늑대 at 2009/11/02 22:16
아마... 대부분은 농민... 느흐흐흐
Commented by 꽃장비 at 2009/11/04 11:18
근데 향리에게 녹봉을 보장한다고 해도 부패가 확실하게 감소할것 같지는 않아요.
그 시대에 글을 안다는거는 그래도 그 집안이 입에 풀칠은 어느정도 하고 산다는 얘기잖아요.
줄기는 줄겠지만 획기적으로 줄지는 회의적이네요.

결국 지방관이 향리의 견제세력 역할을 충실하게 해야지만 잘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란건데,
지방관들도 결국 지방 거대호족세력에 속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볼때,
너무 이상적인 시스템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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