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이라는 것은 다들 아시겠지만 한 나라를 지탱해 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세금이 많이 걷히면 대물빠들이 좋아라 하는 크고 웅장한 건물 올리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요. 헌데 말입니다, 유사한 시대 일본이나 중국등에 비하면 조선의 세금은 의외로 낮은 수준이었습니다. 일단 파고들면 다른 이야기를 못할 것도 아니지만 일단 공식적으로는요. 그래서 오늘은 세금에 대해 한번 이야기 해 보려고 합니다.
고등학교때 국사 교과서에서 배우는 내용인데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군요) 조선 초기에는 토지의 상태에 따라 전분육등법을 실시했습니다. 일단 400두를 생산할 수 있는 토지를 한결로 삼는데 토지의 질에 따라 400두를 생산할 수 있는 면적이 달라지기 떄문에 이를 여섯 등급으로 나누고 그 상태에 따라 세금을 걷는 것을 말하죠. 헌데 여기에 연분구등을 플러스 하게 되는데 암만 좋은 땅아리도 그해 기후에 따라 생산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각지의 수령에게 각 결로 묶인 토지의 산출에 따라 가장 좋은 등급에서 가장 낮은 등급까지 아홉으로 나눠 세금을 적절하게 거둬 들이는 것이지요.
다른 나라에서는 일정량의 토지에 일정량의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 주류였던 것을 생각하면 조선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었다고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이게 한 지역을 단위로 묶어서 세금을 걷는데다가 일일이 그해 파종부터 작황까지 몽땅 다 지방 수령이 조사해 보고해야 했기 떄문에 상등급 토지와 하등급 토지가 같은 세금을 내는 일도 생기고, 수령이 할 일이 너무 많아 정상적으로 조사 하기도 힘들고 또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반발 또한 심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작년에는 50석을 내라고 했다가 올해는 작황이 좋으니 60석을 내라고 하면 기분 좋으시겠어요? 거기다 지방의 이해 관계 또한 있는거고요. 결국 인조대에 이르면 "이것 저것 골치 아프다 썅~ 그냥 무조건 한 결당 4두만 내라" 로 변해 버립니다, 이게 영정법이죠.
헌데 이 연분구등의 세율이 어느 정도였느냐면 농사가 풍년인 해에 가장 좋은 토지에서 내야 할 세금이 한결당 20두, 가장 낮은 하하년에는 4두 정도였습니다. 한결당 생산할 수 있는 량이 400두니까 높아봐야 5% 낮으면 1%를 세금으로 냈던겁니다. 아마 지금 세율보다 낮은 수치죠. 지금 월급쟁이들이시라면 반색을 할 만한 세금이었던 겁니다.

허면 유사한 시기 일본은 어땠을까요? 사실 딱 같은 시기를 맞추지는 못합니다.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니까요. 일단 일본의 전국시대는 만날천날 전쟁하던 시기라 좀 그렇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통일한 에도시에의 기준으로 보자면 놀라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계급제를 철저하게 만들었던 이에야스라서 그런지 농민은 그야말로 "세금내는 짐승" 정도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는 "농민들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끔 잘 알아서 세금을 거두라." 라고 말할 정도였죠. 애초에 무기도 쥘 수 없고 다른 지역에 옮겨 살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농사 지어 사무라에게 바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둬들인 비율은 50%~70% 정도였지요. 한마디로 농사 지어서 자기 입에 먹을 것은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거기다 쌀이 현금처럼 쓰이는 쌀본위제였던 만큼 각 번주들은 쌀을 조금이라도 더 생산해 내기 위해 농민들을 닥달했고 각종 구황작물을 심을 공간도 쌀을 심느라 구황 작물은 생각하기도 힘들었죠. 이러다 보니 해방기가 관련된 향보, 텐메이 텐포 대기근떄 사망자가 (기록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최저와 최대를 기록하면) 최저 15만에서 최대 400만까지 굶어 죽어 나갔던 것입니다. 흔히 에도시대에 일본은 장삿꾼들 그러니까 상업력을 키워서 후대에 그렇게 발전했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실상을 보자면 각 번은 하나의 나라와 같아서 이동이 자유롭지 않으니 대부분 상인들을 이용해 거래를 했는데 이러다 보니 (워낙에 금액이 크다 보니) 사농공상의 하층인 상인들이 큰 돈을 만지고 크게 커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서 물론... 세금이 꼭 쌀만 내는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공납이라고 해서 각 지역의 특산물을 세금을 내는 경우도 있었죠. 사실 대부분의 폐단이 이 공납과 군포에서 나왔다고 할 만큼의 것들인데 그나마 측정이 쉬운 쌀에 비해 특산물은 세금 측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자기 지역의 특산물이 아님에도 자기 지역에 할당되어 무조건 납부해야 할 경우도 있었고 바로 전해에 몽땅 다 쓸어가서 별로 남지 않았음에도 올해에 똑같은 량을 또 내라고 해서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군포도 마찬가지, 알다시피 군대가기 싫으면 군포를 내라는 것인데 군대 비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죠. 조선에서는 쌀과 함께 베도 현금처럼 쓰이곤 했는데 조선은 일종의 징병제를 택하고 있는 바, 거의 대부분의 양인은 군역을 져야 했습니다. 헌데 군대에 나가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기죠. 그리고 군대는 주는 것 없이 빡세기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띠바~ 군대 안가는 방법 없나?" 라고 하니 "그럼 돈 좀 내라, 빼줄꼐" 라고 한거죠, 그게 방군수포 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불법인 것이 하도 만연하니까 중종때에는 군적수포라고 공식적으로 돈 주고 군대 빼는 제도가 생긴거죠.
자 헌데 위의 두가지 세금은 직접세가 아니라 일종의 간접세였습니다. 일단 쌀은 농민들이 먹고 살아야 하고 다음해 파종을 위한 것도 있어야 하니 중앙집권제의 국가에서 조금이라도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막장으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세금을 더 거둘 공간은 바로 이 간접세에 있는 것이죠. 지금도 직접세를 올리는 것 보다 콜라같은 물건에 세금을 붙이는 간접세야 말로 야금야금 세금 거둘 메인 링이나 마찬가지죠?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라 평시에는 그나마 괜찮은데 임진란과 병자란을 겪으면서 나라에 세금이 부족하니 이 간접세를 메인으로 삼은 것입니다.
원래는 세금이 아닌 것이 세금화 되었고 나라 제정이 어려운 전후에 이것을 집중적으로 긁어내다 보니 각종 폐딴이 쌓여버린 것입니다. 아이에게도 군포를 물리고 죽은 사람도 사망 처리를 안하고 군포를 물리고... 이러니 조선의 민란은 주로 이 간접세로 인한 민란들이 많았지요. 소위 삼정의 문란이라는 것들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책들이 나오지 않을리 없죠. 특히나 조선은 백성에 대한 정책들을 꽤나 신경쓴 만큼 위정자라면 유학적 이념하에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물론 이론상! 뒤에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언제나 이론과 실제의 괴리는 참 난감하죠) 그래서 일단 공납의 폐단을 없에기 위해 아예 몽땅 다 쌀로 내라는 대동법이 실시됩니다. 시작은 임란 이후 류성룡의 제안으로 결당 2말을 내는 것으로 했는데 너무 낮은 세율 때문에 이익이 없자 폐지해 버렸다가 다시 광해군때 한백겸과 이원익에 의해 살아났다가 인조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자리를 잡게 되죠.
처음 류성룡이 제안했을 때 결당 2두 였던것이 광해군때 봄과 가을에 결당 8두로 그러다가 몇번의 변화 과정을 거치고 결당 12두로 통일되게 거둬 들입니다. 이 대동법의 실시로 농민들의 부담은 크게 줄어들게 되죠 물론 토지 지주들은 난데없이 토지세를 내는 형태가 되다보니 반대를 했지만 말입니다. (주로 대지주였던 서인들) 그럼 군포는 어떨까요? 중종떄 공식적으로 내는 군적수포 실시로 한해 베 두필 정도가 공식적이었습니다. 별로 부담스러운 일은 아니었쬬. 문제는 언제, 누구에게 내는 것이 공식화 되지 않았던지라 오군영에 두필, 지방관청에 두 필, 조정이 두필... 이러다 보니 공식 두 필이 실제로는 몇십필에 이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니 민란이 안날 수가 있나요? 그리고 중앙관리들도 당연히 이 문제점을 인지하는 바. 영조때에 중앙에 한하여 딱 한필로 정해지는 균역법이 시행됩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개선의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이지요.
그렇다면 조선 농민들이 한해 부담해야 하는 세금은 전부해서 얼마나 되었을까요? 조선 후기를 기준으로 보자면 일단 공식적 세금이 400두당 4두로 1%, 그리고 공납대신 쌀로내는 대동법으로 내는 양이 12두 정도로 약 3% 정도, 군납으로 나가는 베를 쌀로 환산할 경우 현종때 김시진이 올린 장계에 따른 비율로 보면 베 한필당 쌀 5두~7두 사이. 그러니까 한 집안 장정 네명을 기준으로 2필 기준 55두. (물론 뒤로가면 또 줄어들어 버립니다 25두 정도로) 가장 높은 상태로 계산하면 16% 정도의 세금. 결국 다 합하면 대략 20~25% 많은것만 골라서 계산한다 해도 30%를 넘지 않는 세금인 것입니다.
자~ 조선은 바로 이 20~30%의 세금으로 국가를 운영하던 나라였던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대규모 공공 사업은 사실 하기가 힘들죠. 농민을 착취하면 조선은 중앙집권의 위력으로 거대 건축물은 우습지도 않았을 겁니다. 허나 유교적 공민이념으로 무장된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던 것이지요. 일본처럼 50%는 기본이고 쫙쫙 기름을 짜내 70%까지 거둬들여 백성들이 몇백만이 굶어 죽는 사태가 벌이지기도 하는 상황과 비교하면 참 대단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흉년때 조선은 구휼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요.

헌데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그럼 조선에서 일어난 각종 민란들은 뭐냐?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이상과 실제의 괴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중앙집권제 국가라고 하지만 조선의 임금은 신하들에 의해 상당히 제약받는 편이었습니다. (동시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그리고 각 지방의 향반들도 나름 대단한 위세를 떨쳤죠. 이러다 보니 관리가 제대로 정신머리 박힌 사람이라면 조선은 그야말로 지상천국(?)이 되는 것이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요? 권력과 재산을 탐하는 관리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이들이 지방의 향반들과 결탁해 자신의 세력을 키워가면서 농민을 비공식적으로 착취하는게 중앙으로 들어가는 세금보다 훨씬 많았던 것입니다.
거기다 향리! 고려시대만 해도 월급받는 관리이던 향리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급여가 사라져 버리다 보니 향리들은 세금을 거둬들인 것에 자신의 몫을 떼어 먹고살 수 밖에 없었죠. 이것도 적당히 떼어 먹으면 별 무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떡을 먹으면 떡고물이 묻기 마련이고 돈을 보면 더 많은것을 탐내기 마련이죠. 향리들은 이런 떡을 만지면서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농민들은 세금을 내다가 허리가 휘어질 판이었죠. 탐관오리 하나가 지방관으로 오면 그 사람의 임기동안 탈탈 털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의 왕권이 강해지고 권력 구조의 기강이 바로 설 때는 백성들은 아주 편하게 농사 지으며 살 수 있었고 중앙집권화가 약해지면 부정 부패가 생기고 농민들은 죽어나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죠. 이러다 보니 민란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선의 민란을 살펴보면 대부분 세도정치로 기강이 문란해지는 경우였고 민란의 성격을 봐도 국가전복을 위한다던가 단순히 쌀만 내놔라 하기 보다 지방관을 갈아라는 정도가 상당부분이었습니다. 즉 제대로 된 관리만 오면 삶이 달라진다는거죠.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특히 19세기 이후의 민란을 보면)
조선에 대해 살펴보면 살펴볼 수록 조선의 정치 이념이나 행정구조는 오히려 지금보다 낫다는 생각을 할떄도 많습니다. 물론 민주주의 시대와 조선시대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조선이 행했던 애민정책들은 동시대 어떤 국가보다도 훌륭했다고 자부할 수 있지요. 만약 조선의 왕이 개인과 왕조의 영달만을 생각해 강력하게 백성을 통제하고 세금을 거둬 들였다면 거대빠들이 좋아라 할 것들이 조선 곳곳에 생겼을 것입니다만 과연 자신이 상위 10%의 권력자에 속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정도 능력이라면 거대빠로 자위하는 것에 앞서 지금도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과연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일까? 등등을 생각하게 됩니다.
고등학교때 국사 교과서에서 배우는 내용인데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군요) 조선 초기에는 토지의 상태에 따라 전분육등법을 실시했습니다. 일단 400두를 생산할 수 있는 토지를 한결로 삼는데 토지의 질에 따라 400두를 생산할 수 있는 면적이 달라지기 떄문에 이를 여섯 등급으로 나누고 그 상태에 따라 세금을 걷는 것을 말하죠. 헌데 여기에 연분구등을 플러스 하게 되는데 암만 좋은 땅아리도 그해 기후에 따라 생산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각지의 수령에게 각 결로 묶인 토지의 산출에 따라 가장 좋은 등급에서 가장 낮은 등급까지 아홉으로 나눠 세금을 적절하게 거둬 들이는 것이지요.

헌데 이 연분구등의 세율이 어느 정도였느냐면 농사가 풍년인 해에 가장 좋은 토지에서 내야 할 세금이 한결당 20두, 가장 낮은 하하년에는 4두 정도였습니다. 한결당 생산할 수 있는 량이 400두니까 높아봐야 5% 낮으면 1%를 세금으로 냈던겁니다. 아마 지금 세율보다 낮은 수치죠. 지금 월급쟁이들이시라면 반색을 할 만한 세금이었던 겁니다.

<조선의 관리는 이것저것 빠쁘답니다>
허면 유사한 시기 일본은 어땠을까요? 사실 딱 같은 시기를 맞추지는 못합니다.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니까요. 일단 일본의 전국시대는 만날천날 전쟁하던 시기라 좀 그렇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통일한 에도시에의 기준으로 보자면 놀라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계급제를 철저하게 만들었던 이에야스라서 그런지 농민은 그야말로 "세금내는 짐승" 정도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는 "농민들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끔 잘 알아서 세금을 거두라." 라고 말할 정도였죠. 애초에 무기도 쥘 수 없고 다른 지역에 옮겨 살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농사 지어 사무라에게 바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둬들인 비율은 50%~70% 정도였지요. 한마디로 농사 지어서 자기 입에 먹을 것은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거기다 쌀이 현금처럼 쓰이는 쌀본위제였던 만큼 각 번주들은 쌀을 조금이라도 더 생산해 내기 위해 농민들을 닥달했고 각종 구황작물을 심을 공간도 쌀을 심느라 구황 작물은 생각하기도 힘들었죠. 이러다 보니 해방기가 관련된 향보, 텐메이 텐포 대기근떄 사망자가 (기록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최저와 최대를 기록하면) 최저 15만에서 최대 400만까지 굶어 죽어 나갔던 것입니다. 흔히 에도시대에 일본은 장삿꾼들 그러니까 상업력을 키워서 후대에 그렇게 발전했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실상을 보자면 각 번은 하나의 나라와 같아서 이동이 자유롭지 않으니 대부분 상인들을 이용해 거래를 했는데 이러다 보니 (워낙에 금액이 크다 보니) 사농공상의 하층인 상인들이 큰 돈을 만지고 크게 커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 이 인간 무서운 인간입니다. 대망 보고 좋아하지 마세요. 당신은 농민이 될 확률이 더 높음>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서 물론... 세금이 꼭 쌀만 내는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공납이라고 해서 각 지역의 특산물을 세금을 내는 경우도 있었죠. 사실 대부분의 폐단이 이 공납과 군포에서 나왔다고 할 만큼의 것들인데 그나마 측정이 쉬운 쌀에 비해 특산물은 세금 측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자기 지역의 특산물이 아님에도 자기 지역에 할당되어 무조건 납부해야 할 경우도 있었고 바로 전해에 몽땅 다 쓸어가서 별로 남지 않았음에도 올해에 똑같은 량을 또 내라고 해서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군포도 마찬가지, 알다시피 군대가기 싫으면 군포를 내라는 것인데 군대 비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죠. 조선에서는 쌀과 함께 베도 현금처럼 쓰이곤 했는데 조선은 일종의 징병제를 택하고 있는 바, 거의 대부분의 양인은 군역을 져야 했습니다. 헌데 군대에 나가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기죠. 그리고 군대는 주는 것 없이 빡세기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띠바~ 군대 안가는 방법 없나?" 라고 하니 "그럼 돈 좀 내라, 빼줄꼐" 라고 한거죠, 그게 방군수포 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불법인 것이 하도 만연하니까 중종때에는 군적수포라고 공식적으로 돈 주고 군대 빼는 제도가 생긴거죠.
자 헌데 위의 두가지 세금은 직접세가 아니라 일종의 간접세였습니다. 일단 쌀은 농민들이 먹고 살아야 하고 다음해 파종을 위한 것도 있어야 하니 중앙집권제의 국가에서 조금이라도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막장으로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세금을 더 거둘 공간은 바로 이 간접세에 있는 것이죠. 지금도 직접세를 올리는 것 보다 콜라같은 물건에 세금을 붙이는 간접세야 말로 야금야금 세금 거둘 메인 링이나 마찬가지죠?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라 평시에는 그나마 괜찮은데 임진란과 병자란을 겪으면서 나라에 세금이 부족하니 이 간접세를 메인으로 삼은 것입니다.
원래는 세금이 아닌 것이 세금화 되었고 나라 제정이 어려운 전후에 이것을 집중적으로 긁어내다 보니 각종 폐딴이 쌓여버린 것입니다. 아이에게도 군포를 물리고 죽은 사람도 사망 처리를 안하고 군포를 물리고... 이러니 조선의 민란은 주로 이 간접세로 인한 민란들이 많았지요. 소위 삼정의 문란이라는 것들 말입니다.

<무섭다! 삼정의 문란!!>
그렇다면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책들이 나오지 않을리 없죠. 특히나 조선은 백성에 대한 정책들을 꽤나 신경쓴 만큼 위정자라면 유학적 이념하에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물론 이론상! 뒤에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언제나 이론과 실제의 괴리는 참 난감하죠) 그래서 일단 공납의 폐단을 없에기 위해 아예 몽땅 다 쌀로 내라는 대동법이 실시됩니다. 시작은 임란 이후 류성룡의 제안으로 결당 2말을 내는 것으로 했는데 너무 낮은 세율 때문에 이익이 없자 폐지해 버렸다가 다시 광해군때 한백겸과 이원익에 의해 살아났다가 인조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자리를 잡게 되죠.
처음 류성룡이 제안했을 때 결당 2두 였던것이 광해군때 봄과 가을에 결당 8두로 그러다가 몇번의 변화 과정을 거치고 결당 12두로 통일되게 거둬 들입니다. 이 대동법의 실시로 농민들의 부담은 크게 줄어들게 되죠 물론 토지 지주들은 난데없이 토지세를 내는 형태가 되다보니 반대를 했지만 말입니다. (주로 대지주였던 서인들) 그럼 군포는 어떨까요? 중종떄 공식적으로 내는 군적수포 실시로 한해 베 두필 정도가 공식적이었습니다. 별로 부담스러운 일은 아니었쬬. 문제는 언제, 누구에게 내는 것이 공식화 되지 않았던지라 오군영에 두필, 지방관청에 두 필, 조정이 두필... 이러다 보니 공식 두 필이 실제로는 몇십필에 이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니 민란이 안날 수가 있나요? 그리고 중앙관리들도 당연히 이 문제점을 인지하는 바. 영조때에 중앙에 한하여 딱 한필로 정해지는 균역법이 시행됩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개선의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이지요.
그렇다면 조선 농민들이 한해 부담해야 하는 세금은 전부해서 얼마나 되었을까요? 조선 후기를 기준으로 보자면 일단 공식적 세금이 400두당 4두로 1%, 그리고 공납대신 쌀로내는 대동법으로 내는 양이 12두 정도로 약 3% 정도, 군납으로 나가는 베를 쌀로 환산할 경우 현종때 김시진이 올린 장계에 따른 비율로 보면 베 한필당 쌀 5두~7두 사이. 그러니까 한 집안 장정 네명을 기준으로 2필 기준 55두. (물론 뒤로가면 또 줄어들어 버립니다 25두 정도로) 가장 높은 상태로 계산하면 16% 정도의 세금. 결국 다 합하면 대략 20~25% 많은것만 골라서 계산한다 해도 30%를 넘지 않는 세금인 것입니다.
자~ 조선은 바로 이 20~30%의 세금으로 국가를 운영하던 나라였던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대규모 공공 사업은 사실 하기가 힘들죠. 농민을 착취하면 조선은 중앙집권의 위력으로 거대 건축물은 우습지도 않았을 겁니다. 허나 유교적 공민이념으로 무장된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던 것이지요. 일본처럼 50%는 기본이고 쫙쫙 기름을 짜내 70%까지 거둬들여 백성들이 몇백만이 굶어 죽는 사태가 벌이지기도 하는 상황과 비교하면 참 대단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흉년때 조선은 구휼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요.

<공식적으로는 크게 부담이 없는... 그러나 언제나...>
헌데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그럼 조선에서 일어난 각종 민란들은 뭐냐?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이상과 실제의 괴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중앙집권제 국가라고 하지만 조선의 임금은 신하들에 의해 상당히 제약받는 편이었습니다. (동시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그리고 각 지방의 향반들도 나름 대단한 위세를 떨쳤죠. 이러다 보니 관리가 제대로 정신머리 박힌 사람이라면 조선은 그야말로 지상천국(?)이 되는 것이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요? 권력과 재산을 탐하는 관리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이들이 지방의 향반들과 결탁해 자신의 세력을 키워가면서 농민을 비공식적으로 착취하는게 중앙으로 들어가는 세금보다 훨씬 많았던 것입니다.
거기다 향리! 고려시대만 해도 월급받는 관리이던 향리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급여가 사라져 버리다 보니 향리들은 세금을 거둬들인 것에 자신의 몫을 떼어 먹고살 수 밖에 없었죠. 이것도 적당히 떼어 먹으면 별 무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떡을 먹으면 떡고물이 묻기 마련이고 돈을 보면 더 많은것을 탐내기 마련이죠. 향리들은 이런 떡을 만지면서 자신의 재산을 불리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농민들은 세금을 내다가 허리가 휘어질 판이었죠. 탐관오리 하나가 지방관으로 오면 그 사람의 임기동안 탈탈 털리는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조선의 왕권이 강해지고 권력 구조의 기강이 바로 설 때는 백성들은 아주 편하게 농사 지으며 살 수 있었고 중앙집권화가 약해지면 부정 부패가 생기고 농민들은 죽어나는 상황이었다는 것이죠. 이러다 보니 민란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선의 민란을 살펴보면 대부분 세도정치로 기강이 문란해지는 경우였고 민란의 성격을 봐도 국가전복을 위한다던가 단순히 쌀만 내놔라 하기 보다 지방관을 갈아라는 정도가 상당부분이었습니다. 즉 제대로 된 관리만 오면 삶이 달라진다는거죠.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특히 19세기 이후의 민란을 보면)
조선에 대해 살펴보면 살펴볼 수록 조선의 정치 이념이나 행정구조는 오히려 지금보다 낫다는 생각을 할떄도 많습니다. 물론 민주주의 시대와 조선시대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조선이 행했던 애민정책들은 동시대 어떤 국가보다도 훌륭했다고 자부할 수 있지요. 만약 조선의 왕이 개인과 왕조의 영달만을 생각해 강력하게 백성을 통제하고 세금을 거둬 들였다면 거대빠들이 좋아라 할 것들이 조선 곳곳에 생겼을 것입니다만 과연 자신이 상위 10%의 권력자에 속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정도 능력이라면 거대빠로 자위하는 것에 앞서 지금도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과연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일까? 등등을 생각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