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병의 라이벌, 스위스 용병 vs 란츠크네흐트 (5) by 아빠늑대

란츠크네흐트가 이렇게 병력으로서 구실을 하게 됨과 동시에 또 다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바로 먹고 사는 것이죠. 급여를 받아서 동네 가게에 들러 그 많은 인원이 먹거리를 사는게 아닌 다음에야 뭔가 보급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애시당초 이런 용병에게 정식적인 보급 체계를 갖춘다는건 그 당시 고용주들이 염두에 두질 않았겠지요. 그래서 보급 또한 용병...그러니까 계약된 상인들에게 하청을 주었습니다.

이들을 주보상인이라고 불렀는데요 이들은 식량만 보급하는게 아니라 칼과 창, 총과 탄약, 화약, 갑옷류 등등 돈 될 물건들은 죄다 취급했습니다. 심지어 도박장도 열었고, 병원도 (병원이라기 뭐합니다만)운영했으며, 매춘 사업도 벌였죠. 모두 란츠크네흐트를 상대로 말입니다. 이들은 란츠크네흐트를 보고 먹고 살았는데 부대가 이동하면 이들도 따라 이동했고, 이들이 먹여 살리던 식솔들 그러니까 상인들의 가족들이 또 줄줄 따라서 이동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군대의 행렬에는 이게 도대체 군대인지 아니면 서커스 단원들인지 모를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16세기 판화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는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개선행렬>이라는 대형 목판화의 마지막 6장에 이들의 모습을 그려 넣었는데 지휘봉을 가지고 말을 탄 병참대장 뒤로 질서도 없이, 마차와 도보가 뒤섞여 있고, 남자와 여자가 그리고 아이와 노인들이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심지어 병참부대의 기수 주위에는 젊은 아가씨들이 우글거리는 장면도 들어가 있지요.
<후면 6장중 한장, 줄이지 않았으니 클릭해서 보세요>

당연히 이들의 존재가 군대 자체에는 그다지 좋지는 않았습니다. 행군의 속도도 떨어뜨렸고, 이들이 연대장급들에게 바치는 뇌물 때문에 이들이 취급하는 물건들은 값이 비쌌고, 전투가 벌어질때도 근처에 있었기에 상당히 거치적 거렸습니다만 이들이 없으면 당장 내일 먹고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계속 증가일로를 거쳐 17세기 30년 전쟁때는 전투병의 1.5배나 되는 보급대가 존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가 사라지는건 상당히 근대까지 와서 국민군이 되고 나서의 일입니다만 여기서는 언급할 이야기는 아니니 저리로 치워 둡시다.

그렇다면 이 란츠크네흐트를 이끄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기본적으로 이들을 만든 사람은 막시밀리안 1세 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들을 지휘하고 관리하는건 그 휘하의 연대장이죠. 사실 용병대 대장이란건 그다지 자랑거리는 아니었습니다. 귀족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는 했지만 정식 군대도 아니고, 보기에 쎄끈한 군대도 아니고, 심지어 귀족의 가오마저 접어두고 전투시에 말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 조차도 이들을 '동지의식'으로 묶기 위해 말에서 내려 같이 행진하기도 했으니 연대장이라고 뒤에서 말타고 명령만 내린다고 들을리가 없었죠. 고향도 없고, 가족도 멀어진 무뢰배 같은 란츠크네흐트를 길들이는건 매가 아니라 동지의식에 있었습니다.

이런 란츠크네흐트를 가장 잘 다스렸던 사람은 게오르그 폰 프룬츠베르크였습니다. 소귀족 출신으로 장남이 아니라서 상속이 별로 없자 군대에 들어갔고, 군사적 재능이 있어서 승진을 거듭해 용병대장 자리에 올랐죠. 이 사람은 다른 용병대장들처럼 돈 주면 즉시 군주를 바꾸는 스타일이 아니라 꾸준하게 합스부르크가를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로열티가 있는 사람인거죠. 당연히 용병 계약으로 얻는 수익이 크지는 못했지만 병사들은 이 사람을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습니다.

그는 병사들의 수를 부풀려 급여 삥땅치기도 하지 않았고, 병참 무기들을 뒷주머니에 돌리고 저질품을 보급하지도 않았으며, 업자들과 커미션을 붙여먹어 병사들이 사는 물건의 값을 올려놓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전장에서 무모하게 돌격이나 외치는 멍청이도 아니었고, 무기의 질에 항상 관심을 두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다보니 란츠크네흐트는 그를 따랐던거고 실제로 이렇게 했더니만 그의 연대는 가장 최강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덕과 규율이 잡힌 용병들은 그 실적을 현실에 보여주는데 바로 1525년의 파비아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드디어 란츠크네흐트는 스위스 용병을 완전히 밟아 버리게 되죠.

1524년 2만의 프랑스군은 이탈리아의 북부 파비아시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성 안에는 4천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란츠크네흐트도 있었죠. (이때의 황제는 카를 5세) 식량이 떨어졌고 먹을 수 있는 모든것을 먹고 있던 상태였지만 지원군이 올 가능성에 기대 완강히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525년 1월 말경 드디어 지원군 2만이 알프스를 넘어 파비아 교외에 나타나게 되죠. 그리고 2월 24일 파비아 전투가 시작됩니다.

이 전투에서 황제군의 주력은 란츠크네흐트로 선봉에서 전열이 창방진을 이루고, 그 뒤에서 화승총 부대가 사격하는 형식으로 배치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은 프랑수아1세가 직접 참전했고, 주력은 프랑스의 흉갑기병대였죠. (참고로 황제군의 총사령관은 프랑스의 부르봉가의 부르봉 공작. 그러니까 프랑스 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프랑스의 공작이 황제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자기 왕과 한판 붙으러 온겁니다. 유럽은 이런게 꽤 흔합니다. 동양식의 주종 관계로 생각하면 이상해집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스위스 용병부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영국의 리처드 서포트 백작이 이끄는 검은부대라는 독일 용병부대가 또 있었습니다.

지형 자체는 프랑스군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걸 이용해 프랑스군이 초반 황제군을 밀어 붙이고 있었죠. 그러나 기병대에게 창방진을 공격하는 실수를 범하면서 전황이 뒤집히기 시작했습니다. 기병의 압박 돌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그 뒤는 총병의 판이 되었죠.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정면은 프룬츠베르크의 부대가, 좌측면은 에무스 부대가 각각 돌격에 들어갔습니다. 재미있는건 본래 이당시 총기는 보조 무기로, 창병이 주력이고 이들의 주위에서 총기가 보조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알다시피 화승총은 장전의 속도가 느리고, 방어력이 약했기 때문에 주력으로 쓰기가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하지만 이 전투에서 총병은 여지없이 그 위력을 발휘했고, 되려 창병이 총병을 지원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즉, 전투의 페러다임이 변하고 있었던거죠. 방진에만 올인하고 있던 스위스 용병부대는 화력의 압박에 버티지 못하고 진형을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전장에서 가장 큰 피해는 이런 상황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스위스 용병부대는 파비아 근처의 티치노 강으로 내몰렸고 황제군의 직접 공격을 피해 강으로 뛰어든 용병들은 차가운 강에 빠져 죽어나갔습니다.

이 전투로 프랑수아 1세는 포로가 되어 마드리드로 호송되어 감금되었고, 결국 밀라노 공작위 계승권은 완전히 사라지고 부르고뉴 전쟁으로 얻었던 부르고뉴 공국마저 합스부르크가에 넘길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 그리고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았다...라고 해야 하는데 ... 이게 또 그렇게 되지를 않았습니다. 물론 란츠크네흐트 입장에서는 실업자가 될 위기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만... 이 이야기는 다음에.


- 계속

덧글

  • 호랭총각 2017/03/05 16:57 #

    일개 용병단도 저럴진대, 리더의 중요성은 말해봤자 입만 아프거겠죠...그나저나 갈수록 흥미진진해 지는군요! 다음 편이 기대가 됩니다!
  • 아빠늑대 2017/03/06 13:14 #

    생각보다 더 늘어지고 있네요, 사실 지금쯤 끝나야 했었는데 말입니다. ;;;
  • 자유로운 2017/03/05 17:57 #

    시대의 흐름을 바꾼 전투였군요.
  • 아빠늑대 2017/03/06 13:14 #

    사실 딱 끊어서 여기서 부터는 ~다 라고 하는건 뭐합니다만 어쨌거나 흐름이 변한건 분명한 사실이지요.
  • 무지개빛 미카 2017/03/05 20:16 #

    도덕과 규율이 잡힌 용병이라... 정말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부대를 만들었군요. 용병이 저러기 굉장히 어려운데...
  • 나인테일 2017/03/05 20:44 #

    급여와 복지가 괜찮다면 인성에서도 퍼포먼스를 높이는건 불가능하지 않겠죠. 사람 가려받을 수 있으니까요.
  • 무지개빛 미카 2017/03/05 20:52 #

    나인테일//급여와 복지만으로 규율이나 동지의식, 전투에 필요한 통제력은 생기지 않습니다. 국가가 나서서 이들에 대한 관리,또는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야 목숨을 걸 가치가 있다고 인식하는 겁니다.

    이 포스팅에서도 게오르그 폰 프룬츠베르크라는 사람이 용병들을 이끌면서 보수가 많은쪽에 들러붙는 소위 몸값 쌘 곳 따라 이리저리 소속을 옮기지 않고 오로지 합스부르크가에만 충성합니다.

    이게 중요한거죠. 이게. "소속감" "우리는 어디어디의 군대"
  • 위장효과 2017/03/06 09:56 #

    글쎄요. 프룬츠베르크의 용병부대원에게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저 물주정도의 가치밖에 없었을 겁니다. 오히려 "우리는 바로 '그' 프룬츠베르크의 부대다!!!"하는 게 더 자부심으로 다가왔겠죠.
    저 시기는 아직도 국민국가란 개념 자체가 없던 때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할 겁니다.
  • 아빠늑대 2017/03/06 13:15 #

    아, 다음이나 다다음에서 이야기 하겠지만 결국 그것도 용병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례를 이야기 할겁니다. ^^
  • 존다리안 2017/03/05 21:49 #

    설마 베르세르크의 검은 매가 되기 전의 그리피스 모티브는
    게오르그 폰 프룬츠베르크?
    병사들을 가족같이 연대시켰다든가 장비의 질을 중시했다든가
    잘 통솔된 체계를 갖췄다든가 완전 그리피스군요.

    소속감 하니 로지디아군 생각나네요. 걔넨 비록 용병이었다지만
    인종차별도 없을 정도로 소속감이 강했다는데...

  • 아빠늑대 2017/03/06 13:15 #

    그런데 결과물은 ... 다음이나 다다음 편에서 이야기 하겠지만 결국 양아치 용병을 못 벗어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
  • 파파라치 2017/03/05 23:12 #

    브레히트의 희곡 "억척어멈과 자식들"이 바로 30년 전쟁 시절의 주보상인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죠.
  • 아빠늑대 2017/03/06 13:16 #

    그래요? 전혀 몰랐어요. 예알못이라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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