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탁, 반탁 by 아빠늑대

제가 어렸을 때 신탁통치에 관한 교과서 내용을 보면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공산주의자 일당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서로 극렬한 시위를 벌였다. 라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신탁과 반택에 대해 배우고서 그 뒤로 딱히 보신게 없으시다면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실겁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념 때문에 다시 식민주의적 외세의 지배를 인정했다"라고 말이죠.

일단 그 배경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면, 조선의 독립을 조선과는 전혀 상관없는 강대국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자신들의 국가적 이익에 따라 사바사바 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모스크바 3상 회의라고 하죠. 사실 뭐, 한반도는 그냥 꼽사리적인 것이고 주된 관심사는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에 대한 조율을 하던 거였으니 많은 것들 중에 하나 정도였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한반도를 4개국이 신탁통치하는 <아이디어>가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을 신탁통치하자~ 라고 했던게 아니라 신탁통치를 하는게 좋지 않을까? 였고 그나마도 여기서 정해진건 "그럼 다음에 모이면 그걸 결정해 봅시다"라는 정도였고 한반도에 대한 주된 내용은 한반도에 임시정부는 설치하자 정도로 끝냈습니다.

그런데? 띠바 난데없이 동아일보가 45년 12월 27일에 떡허니 기사를 하나 싣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협상 결과가 나왔는데 소련이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미국이 신탁통치를 반대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 이때는 아직 회의가 끝나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간 논의되었던 것은 미국이 신탁통치를 "50년!!"을 주장했고, 소련은 그건 너무 길다 만약 한다면 5년 정도로 족하다 라는 입장이었습니다. 심지어 임시정부를 둔다는 통치의 주체 마저도 소련이 임시정부를 지지했어요.

물론 소련이 한반도를 이뻐하고, 민족의 독립 주체를 지지해서는 절~대 아닙니다만 그 이야기는 논외로 하고, 이 기사가 아니 이 오보가 전해지자 한반도는 난리가 났습니다. 안그래도 식민통치를 겪어서 질려있는데 딴 나라가 들어와서 똑같은 짓을 한다고요?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절대반대!>의 목소리가 주류였습니다. 그런데 좌익 진영은 46년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변해서 찬탁으로 방향전환을 시도합니다.

당시 좌익에 지식인들이 상당 수가 깔려 있었기 때문에 박헌영 등을 비롯한 인물들은 직접 소련으로 찾아가(정정 박헌영은 소련에 간게 아니라 평양에 가서 소련에서 온 레베제프 등을 만난뒤 노선 전회) 뭐가 진실인지?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반대하는 의사를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합의된 사항을 보니 동아일보가 전한 기사와는 맥락이 달랐습니다. 미묘한 단어의 차이로 좌익 그룹은 신탁통치가 아니라 후견제로 파악한 것이었죠. 하지만 이걸 알고 방향을 전환하는건 논리나 이성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우파 진영은 반탁으로 기관차를 몰고 있었고,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확한 논리로 사람을 설득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웃겨서 나중에 사실이 잘못되었음을 안다고 해도 억지를 쓰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진행되던 그 상황으로 계속 밀고 나가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때가 딱 그런 상황이었죠. 실제 우파쪽에서도 비둘기파였고, 사실 관계를 확인한 송진우와 같은 인물은 신탁 찬성쪽이었고, 여운형 같은 좌파쪽 비둘기파들은 극렬 반탁을 삼가자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후일 정확한 사실이 알려진 이후에 좌우를 막론하고 "잘못 알았다 야~ 우리 이러지 말자~"라는 발언들이 나왔지만 글쎄요... 폭주 기관차라니까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자신의 그룹이면 변절자고, 상대의 그룹이면 매국노였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법과 원칙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야기냐고요? 네, 정치적 스텐스가 다르면 암살이 횡횡합니다. 여운형 같은 사람에 대한 암살 시도는 한두번이 아니었다는 건 아시는 분은 아십니다. 또 쓰지만 좌우를 막론하고 서로 상대방을 리얼로 죽이고 테러하고 다녔죠.

덕분에 한반도 남쪽에서 조선 공산당 같은 그룹들은 점차 몰락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한반도 남쪽에서 우파가 득세를 하기 시작하는 계기도 되었죠, 당연하겠지만. 언론사의 오보... 사실 생각하기에 "이거 오보가 아니라 그냥 의도한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황을 보면 실제로 오보였던 듯 합니다. 그리고 이 오보를 우라까이해서 퍼뜨리자 한반도는 남북이 대치하는 이 막장의 상황으로 변해버린거죠. 모든 악의 근원이 바로 이 오보 하나 때문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이렇지만 꽤 오랜시간 저와 같은 세대는 찬탁 운동이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지령을 받고 좌익 테러를 시도한 사건으로 알고 있었지요.

덧글

  • K I T V S 2017/04/15 12:50 #

    오보 하나의 결과가 서쪽에선 죄를 지은 강대국이 다시 통합된 거였고... 우린 주체왕국의 등장이었...ㅠㅠ
  • 아빠늑대 2017/04/15 19:44 #

    그리고 지금까지 업보를 계속 이어받고 있지요
  • 존다리안 2017/04/15 13:05 #

    사실 우리나라 역량으로는 좌우를 막론하고 통합해 신정부를 세워 국가를 이끌어나가도 모자랄 판국이었는데 저따위로 분열되서리...ㅜㅜ
  • 아빠늑대 2017/04/15 19:44 #

    애초에 합치할만한 통합점이 그다지 보이지 않았죠.
  • RuBisCO 2017/04/15 13:12 #

    다만 상호간에 암살배틀이 벌어질 정도가 된건 이미 그 이전에 충분히 균열이 발생해 있었던 탓도 큽니다. 이미 자유시참변부터 시작해가지고 사회주의 진영측에서 벌인 실책과 그로인한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의 불신 같은게 합쳐져서 사이가 별로 안좋았죠.
  • 별일 없는 2017/04/15 13:55 #

    대표적인게 김좌진 암살
  • 아빠늑대 2017/04/15 19:45 #

    물론이지요. 하지만 그 전까지는 민족주의적 국가 건설이라는 당면 과제를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저 사건 이후로는 극명하게 상대방의 말살이 되어 버렸죠.
  • 호랭총각 2017/04/15 17:32 #

    그야말로 극단의 시대였으니까요...결국은 한국전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군요.
  • 아빠늑대 2017/04/15 19:45 #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지요. 징하게 말입니다.
  • 자유로운 2017/04/15 23:08 #

    오보 하나가 역사를 바꾸었네요.
  • 아빠늑대 2017/04/16 14:32 #

    불티가 된거죠
  • 이명준 2017/04/16 05:07 #

    근데 그 오보가 역사를 바꾸었다고 하기는 조금 지나친 가정이 아닌가 싶은데요 이미 자유시참변 고려공산당 자금 사건 김좌진 암살등 이미 서로간의 앙금이 쌓일때로 쌓인 상태라서 저 사건이 없었더라도 제대로된 하나의 정부가 탄생 되었다고는 믿기 힘들어요

    조병옥이나 이승만이나 김구 신익희등 우익거두들은 좌파들 다 제거할 생각을 해방시점때부터 가득한 인간들이었는데 저 사건이 없었다고 평화로운 단일정부 구성이 되었다는걸 믿을 수가 없죠
  • 아빠늑대 2017/04/16 14:34 #

    그 전까지 정파적 대립은 계속 있어왔습니다만 민의까지 양쪽으로 나눠진 불티가 되는 사건이라고 보는거죠. 명분이 필요한데 딱 적절한 명분을 던져줬고, 그게 국민적 감정까지 해치는 상황이 되니 물들어올때 노저은거죠.
  • VeraIcona 2017/04/17 01:32 #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박헌영이 당시 모스크바에 갔음을 보여주는 사료가 발견된 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그가 입장 선회 전 소련에 갔다고 쓰신 근거를 알 수 있겠습니까?
  • 아빠늑대 2017/04/17 10:54 #

    아. 다시 수정합니다. 소련에 간게 아니라 평양에서 레베제프를 만나서 노선 전회한 건을 소련에 간걸로 잘못 적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rumic71 2017/04/17 17:40 #

    전 '소련이 찬성해서 찬탁한거지 반대했다면 반탁이었을거다' 라고 배웠습니다만 뭐 큰 의미는 없군요.
  • 아빠늑대 2017/04/17 21:24 #

    어릴때 다 그렇게 배웠지요. 저도 그렇고요. 그런데 시작부터 잘못 꿰어진 단추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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