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 왔습니다 by 아빠늑대

추석 잘 보내고 왔습니다. 그런데 블로그 화면이 다 깨져 있네요? 혹시 다른 분들도 스킨이 깨져 보이시나요? 일단 브라우저 정리를 하고 다시 로그인 해 봐야겠네요.

바이온트 댐 참사 by 아빠늑대

이탈리아 북동쪽, 베니스에서 북서쪽으로 100km 를 더 들어가면 바이온트 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1차 대전때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로 부터 빼앗은 지역인데, 대충 짐작할 수 있다시피 이쪽은 산이 높고 골은 깊은 지형입니다. 여기에 피아베 강 지류가 있는데 이탈리아의 사업가 주세페 볼피는 여기가 돈이 될꺼라는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일단 골이 깊으니 물을 많이 가둘 수 있고, 이 지역에 수력 발전을 시작하면 근처 밀라노 공업지대에 전력을 판매할 수 있어서 큰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거죠. 주세페는 전기, 수도, 철도 등의 기간 산업으로 크게 한 몫 잡은 사람인 만큼 이런 빅 찬스를 놓칠 수 없었죠. 실제로 계산해 본 바, 이 좁은 협곡을 막으면 물의 양만 1억 1500만 m3 (부피의 단위 루베) 가량의 수량을 저장할 수 있었고 이 정도면 주세페의 인생 역작이 될 수 있는 토목공사였죠.

본래 1920년 부터 계획했지만 무솔리니가 잘 나가던 시절에 뽕짝 뽕짝 하다가 그가 거꾸로 매달린 뒤에 잠시 중단되었죠. 하지만 이정도 규모의 프로젝트라면 뒤에도 욕심을 안낼 수가 없습니다. 전쟁 이후 다시 타당성 검사를 시작했고 1957년 부터 본격적으로 댐 공사가 시작됩니다. 헌데 문제는... 건설 전 조사 과정에서 공학자들이 많은 논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의 지형이 석회암, 조금 더 설명해 보자면 돌로마이트라는 암석이 계곡 양쪽에서 경사를 이뤄 내려가고 있었다는 겁니다.
<딱 봐도 지형적으로는 적은 공사비, 큰 효과가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지형이 단단하지 않았다는 거죠. 이미 댐을 건설하기 전에도 자연적으로 지역 지층이 계곡 아래로 흘러내리는 현상들이 존재했었습니다. 당연히 물이 가득할 경우 이렇게 흘러내린 토사들이 산사태처럼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은 공학자들이라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죠.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걸린 일에 비관적으로 보기 보다는 낙관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 였죠. 학자들은 정치적 이익과 경제적 이익을 감안해 "계곡에서 그런 산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낮음" , "산사태가 일어난 다 해도 흘러내린 암석이 작아 큰 위험을 끼치지 못할 것" 이라는 보고를 해 버립니다.

물론 시민단체들은 이런 판단에 동의하지 않았죠. 석회암 지형이 물에 녹으면 형태가 망가지는 것은 예상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미칠 수 있으니 이 댐 건설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외쳤죠. 그러나 정,경이 유착된 상황에서 그들의 말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정치권은 댐 건설에 부정적인 언론 보도는 강제로 중단시켰고, 반대를 외치는 시민단체나 지역민들을 빨갱이 (파르티잔)으로 몰았습니다. 빨갱이들이 이탈리아의 발전을 막고, 공산화 시키려는 음모라는 거죠.

결국 이런 협잡에 의해 댐은 1960년 결국 완공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댐은 댐이 완공되기 전인 1960년 2월 부터 벌써 물을 서서히 채워 올리기 시작했는데 그해 3월이 되면 물 높이가 130m 까지 올라와 있었죠. 그리고 주변의 지형 변화도 이미 목격되기 시작했습니다. 댐 수위가 170m에 이를 때, 주변 지층이 하루 3.5cm 정도의 이동을 하는 것이 관찰되었던거죠. 그리고 그와 동시에 2km에 달하는 거대한 절리가 댐 쪽으로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절리 : 자연 현상에 의해 생기는 거대한 틈, 종류가 많으니 검색해 보세요)

그리고 그 해 11월에는 아예 거대한 암석 덩어리가 10분 사이에 저수지 바닥으로 쓸려 내려가 버렸습니다. (70만 m3 라고 함) 전문가들은 이런 일이 있어도 작은 덩어리가 천천히 진행될 것이라고 했는데 정작 실제로는 엄청나게 큰 덩어리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려간 것이었죠. 일은 심각했습니다 바이온트 댐의 관리자들은 급히 수위를 낮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댐의 수위를 135m 까지 내리자 지층 이동은 하루 1mm 정도로 줄어들었죠.

일이 심각해 졌지만, 한 번 일에 손댄 그룹들은 절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죠. 댐 사용을 중지시키는게 아니라 "물을 낮추니 느려지네? 그럼 적당히 조절해 가면서 전기를 생산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하는 것이었죠. 결국 현장에서는 사면의 이동 속도를 봐 가면서 물의 높이를 다시 높이기 시작하는데 1961년 5월 부터 1962년 6월까지 다시 185m 가량의 수량을 확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지층의 이동이 빨라지지 않았고, 이에 다시 11월 경에는 수위를 235m 까지 올립니다.

이렇게 슬슬 눈치 봐가며 물을 조절하는데 의외로 이동 속도도 느리고, 반응도 괜찮은 것 같으니 간덩이가 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아~ 요래 요래 하면 댐을 잘 쓰겠구만 뭐~" 라고 말이죠. 이렇게 부어오른 간덩이로 1963년 4월 경에, 이번에는 빠르게 함 해보자! 라며 순식간에 수위를 231m까지 올렸습니다. 그리고 올리면서 지층 이동 속도를 보니 하루 0.3cm 정도 증가한 정도 밖에 안되는 겁니다. 이제는 써먹어도 될 것 같다는 안이한 생각을 가슴 속에 품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해 6월이 되면 수위를 240m 까지 올려버립니다. 그리고 이동 속도는 0.5cm 정도 증가했는데, 사람은 0.xx 단위의 변화는 몇 번 보게되면 별거 아닌 것처럼 여기기 되는 때가 오죠. 매번 몇 십 mm 씩 증가하는게 실제로는 다 모았을 경우 꽤나 되지만 하루 변화량으로 보면 컨트롤 가능한 것처럼 받아들여 진 것입니다. 이후 잠시 수위를 낮췄는데 이동 속도는 더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것 아니라는 생각에 9월쯤 가면 아예 수위를 245m 까지 확 올려버립니다.

그러자 이동 속도도 3.5cm 까지 확 증가해 버립니다. 학자들은 "아~ 요건 안되겠구나, 이제 수위를 낮춰 속도를 늦춰야지~" 라고 생각하고는 9월 말에는 수위를 235m까지 내리는데... ... ... 속도가 안 줄어듭니다. 심지어 하루 이동 속도가 20cm 까지 엄청나게 늘어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1963년 10월 9일 22시 38분. 계곡에 붙어있을 힘을 잃어버린 암석 층은 시속 95km 의 속도로 급격하게 댐의 바닥을 향해 들이치기 시작했고, 불과 45초 정도에 댐 속에 고인 물들을 위로 밀어내 버렸습니다. 계곡을 따라 1.8km 정도의 저수지가 순식간에 가득 채워졌고 절리된 암석들이 만들어낸 충격파는 200~300m 의 민물 쓰나미를 만들었습니다. 이 쓰나미는 댐 맞은편의 작은 마을을 순식간에 덥쳐 버렸고, 심지어 1.5km 나 더 진행된 이후에도 파도의 높이는 70m나 될 정도였습니다.

이 인재로 인해 2600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망해 버렸고, 마을 하나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들은 이런 재해가 있을 때 어떤 자연의 경고도 보지 못했고 (바다의 쓰나미는 물이 빨려 나가는 징조라도 있지만 인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알려주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들이 사망하고 마을이 사라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6분이 넘지 않았습니다. 이 마을의 이름은 롱가르네. 그러나 2600명의 사망자는 이 마을의 숫자였을 뿐이고, 실제로 주변의 마을들인 피라고, 리발타, 빌라노바, 파에 등등의 사상자를 포함하면 5000명이 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엄청난 사고 이후 이탈리아는 이 지역을 2002년까지 접근 금지구역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에는 유네스코로 부터 "인류 역사상 기억해야 할 사고"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6분만에 마을과 사람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뒤의 책임은 누가 졌을까요? 건설을 추진했던 주세페는 이미 노환으로 죽고 없었고, 1968년 정경유착형 하청공사 및 설계미숙에 관련한 법정 진술을 기다리고 있던 설계자 마리오 판치는 진술 하루 전 자살을 하게 되면서 사건 자체가 흐지부지 되어 버립니다. 사실 마리오 판치의 경우 이 댐을 설계할 때 부터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댐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기도 합니다만, 증언자가 사라자게 됨으로서 결국 책임의 소지는 녹아 버린 것이었죠.

결국... 우리는 지금 우리 땅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지 않을까? 를 생각해 보는 건 무리한 일은 아니지 싶습니다.



김어준 팟케스트 방송 by 아빠늑대

심심해서 김어준의 팟캐스트 방송을 듣다보니 "미국과 북한이 치킨런을 하는 것 같아도 나중에 김정은과 손 잡으며 평화상이라도 노릴지도 모른다" 라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러니까 북한이 더 이상 핵 확산을 하지 않는 정도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그걸 치적으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발언이었던 것 같은데 글쎄요. 북한이 핵무장을 한다는 것은 핵의 연쇄 효과를 일으킬 것이라는 것 쯤은 미국 싱크탱크도 알고 있겠죠.

우리나 일본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나 일본 쯤 되는 나라들은 핵을 만들어 봐야 되려 세계의 압박에 손해가 너무 커서 정권이고 뭐고 깝깝한 상황을 맞이할 겁니다. 헌데 잃을게 별로 없는 나라들은요? 사실 핵무기 자체는 그다지 만들이 어려울 것이 없는지라 그래도 그럴듯한 국가라는 형태가 있으면 할만 하거든요. 이란이나 발칸쪽 나라들이나 미국이 불량국가라고 자꾸 찝쩍거리는 나라들은 해볼만한 도박이라 여길거에요. "북한도 헀는데 우리도?" 라고. 북한이 핵기술을 그런 나라들에게 이전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죠.

그러니 단순히 핵무장을 동결시키거나 하는 정도에서 미국이 북한을 인정해 버리는 것은 트럼프의 마인드의 여부에 따라 결정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혹시 모르죠, 정말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폐기하고 UN 등의 기구에 그 감시를 맞긴다면 그 공이 트럼프에게 돌려져 평화상 같은걸 넙쭉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한다고 생각하기 어렵죠.

솔직히 경제적 압박도 북한에게 얼마나 타격을 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이미 고난의 행군으로 단련이 된 놈들인데 중국이 살아있는 지원을 해 주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국제 기구가 굶어죽지 않을 상황을 만들어 준다면 북한은 어려움을 참고 있다가 핵무장 국가로 공인 받는 쪽이 훨씬 낫다고 여길거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이 실타래가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이기도 하겠고요. 단순히 동결이 아니라 정말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정까지 받는다면? 그때는 불량국가가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들이 몰래 핵무기를 개발하려 드는 것을 막는게 큰 고난이 될겁니다. 한국은 원전이 널렸고, 일본은 플로토늄도 널렸죠.


일없네 by 아빠늑대

연휴가 너무 길다 보니 오히려 뭘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3,4,5일은 본가에 다녀올 예정인데 중간에 그렇게 끼어 있으니 어디 멀리 나가는 것도 계획하지 못하겠고, 어디 바이크 타고 나가려 했더니 지금 부터 내일까지 비가 오네요.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외국으로 떠나갔고 TV를 안즐기다 보니 시간이 무척이나 길군요. 역시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 갑네요.

조선시대 닭요리 by 아빠늑대

치킨을 시켜다가 뜯고 있자니 닭요리에 대해 궁금증이 생겨서 찾아 봤습니다. 사실 요 닭이라는 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키우기 쉽고,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괜찮은 맛과 칼로리와 영양을 주는 놈 아니겠습니까? 당연하게도 조선시대에도 닭을 잡아 먹었지요. 그런데 후라이드를 해서 먹지는 않았겠지요, 기름은 귀합니다.

그렇다면 주로 나오는 닭 요리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가장 첫번째로 죽으로 만들어 먹는 것. 이것도 참 동서양을 막론하고 치킨 스프나 닭죽이 있는 걸 보면 가장 편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산림경제>를 보면 일단 먼저 닭을 물에 넣고 삶아서 푹 퍼지도록 익힌 뒤 살을 발라내고, 국물은 체로 기름과 불순물을 걸러내서 따로 멥쌀과 발라낸 살을 넣어 다시 끓인 뒤 소금간을 합니다. 취향에 따라서는 달걀을 깨 넣고 다시 삶는 레시피도 있었다는군요.

다음으로 조금 고급스럽게 먹는다면 칠향계로, 일곱가지 나물을 넣고 삶은 요리인데 <산림경제> <정일당잡지>등 여러 책에 많이 소개된 흔한 음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닭을 씻어서 내장을 빼고, 그 자리에 삶아서 쓴 맛을 뺀 도라지, 생강, 파, 천초, 간장, 식초, 기름을 써서 섞은 뒤 닭의 뱃속에 넣고, 이걸 항아리에 넣어 기름종이로 입구를 봉한 뒤 다시 가마솥에 넣고 찐다고 되어 있습니다. 닭 속에 들어가는 재료는 표고가 되기도 하고, 순무나 토란, 다시마를 넣기도 했다는군요.

또 수증계라는 닭 요리가 있는데 이건 <음식디미방>에 나온 것으로 암닭을 털과 뼈를 뽑은 뒤, 퍽퍽살과 엉덩이 살을 두들겨 준비를 해 두고, 솥을 달군뒤 기름을 반종지 정도 넣고, 거기에 두드린 고기를 볶아서 익힌 다음, 거기에 물을 가득 부어 끓이면서 토란 한되를 같이 넣고 어느정도 삶아지면 고기와 나물 등을 모두 건져내고 그 국물에 간장을 넣어 다시 닭을 넣고 끓여 잡내가 사라지도록 한답니다. 그런 다음 전분을 물에 푼 것과 오이 썬 것을 넣고 실파와 부추를 넣고 다 익으면 넓은 대접에 벌여 놓고는 국물을 떠서 자박하게 붓고난 뒤 생강이나 후추로 데코를 한답니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인데 <음식디미방> 방법들은 이런 복잡한 것들이 많더군요.
<이게 수증계라고 하네요>

하지만 모두가 쪄 먹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구이 방법! 닭을 내장을 뽑아 손질한 뒤, 간장과 참기름을 속에 바르고 봉한 다음, 눅눅한 볏짚을 닭에 칭칭 감아 물에 담궜다가 모닥불 속에 통째로 던진답니다. 한시간쯤 지난 뒤 볏짚을 벗겨내고 재를 턴 뒤에 구워진 닭을 소금과 장에 찍어 먹는다는데 오래 구우면 맛이 없어지니 적당하기 구우라고 하는군요.

그리고 닭튀김이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오주연문장선산고>를 보면 튀긴 닭이 나오는데 참기름에 튀깁니다. 일단 닭을 손질해서 소금을 뿌려 간을 한 뒤, 바로 참기름에 넣어 튀기는데 참기름은 끓는점이 낮아서 저질품을 쓰면 금방 타버려 못 씁니다. 그래서 꽤나 괜찮은 고급 참기름을 써서 튀겨야 했으니, 지금 공산품 참기름 정도로는 힘들거니와 그 가격을 생각해 봐도 엄청나게 비싼 음식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재료들과 함께 닭을 찌거나 삶아 먹는 방법들도 나와 있습니다. 쇠고기를 속에 넣어 찐 음식들도 있고, 연포탕... 아! 지금 연포탕이라면 대부분 낙지를 넣은 연포탕을 생각하지만 이 당시의 연포탕은 주로 두부를 넣었습니다. 정약용은 이 음식을 좋아했는데 솔직히 지금 연포탕과는 맛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단 조선시대 닭요리에 마늘이 들어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이 닭 요리에 계란을 까 넣기도 하고, 양념은 주로 담백한 천초나 간장 정도에서 끝나고 속도 두부니 비린맛이 꽤나 있었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지금 남아있는 요리책들의 요리를 06년이었나? 그때 학자들이 음식 연구가들과 함께 복원한 적이 있었는데 참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맛에 맞지 않았다고 하죠. 요즘에는 맵고 짜고 양념이 꽤나 많이 들어가는 음식들이 많은데 당시에는 그런 것 보다는 주로 담백하고 재료맛 위주의 음식들이 많았던지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몇몇 서적에서는 병자를 위해서는 죽이 아니라 닭곰탕을 권하고 있고, 영계를 요리하는 방법과 노계를 요리하는 방법을 따로 자세히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농정회요>라는 책을 보면 늙은 닭은 앵두나무 가지를 교차시켜 솥 안에 넣고 그 위에 닭을 올리고 삶으면 살이 부드럽고 맛있게 삶아진다고 하는데 과연 꼭 앵두나무만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참! 그리고 조선시대 닭 요리에는 맥... 주가 아니라 탁주가 붙어 있었습니다. 맑은 술 보다는 탁주가 닭요리에 어울린다고 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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